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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Oct 09. 2021

이건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아닌가

<슬기로운 평대생활>  26일째

성산포항에서 배를 탔다. 우도로 가는 뱃길에서 보는 일출봉은 또 다른 모습이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 우도라는데 어디가 머리고 몸통인지 알 수 없다. 동물의 형상을 닮았다며 어떤 이름도 지을 수 있었겠지만, 우직한 일꾼이자 큰 재산인 소가 가장 무난했으리라.   

우도를 한 바퀴 걸어서 돌 요량이었다. 제주올레로는 1-1코스다. 크지 않은 섬의 빤한 길에 각종 전동바이크가 정신없이 오갔다. 걷는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이 바이크를 탔다.  

무심하게 걷다가도 불현듯 생각이 스치고, 그게 왜 하필이면 지금 떠올랐을까를 묻고, 또 다른 생각과 물음이 꼬리를 물고, 그 연결을 상상하고 다시 질문이 생겨났다. ‘러너스 하이’가 달리는 자의 신체적 쾌락이라면 ‘워커스 하이’는 걷는 중에 오는 정신적인 쾌락이 아닐까. 걸으며 누리는 최대의 호사였다.


‘은퇴’라는 단어를 곱씹는다. 멀어서 막연하고 뿌옇던 은퇴가 조금 형태를 갖추고 또렷해지는 듯했다. 오는 시간이 선명해질수록 지나 보낸 시간들은 오히려 흐려지는 것 같다. 아직 멀다면 먼 삶의 또 다른 변곡점일 테지만,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이라도 구체적인 모습을 띄어갈 것이다. 회사에서 정한 은퇴의 날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떠나는 날은 나의 주체적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니, 그런 이유로 더 일찍 은퇴를 감행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회사를 떠나는 날의 장면을 그려보기도 했다. 뭔가 근사하고 떠들썩한 작별 장면을 상상하다가 그냥 찬물 한 바가지를 스스로에 끼얹는다. 누구의 환송도 받지 않으며 홀로 조용히 편집국을 나선다. 수만 번은 탔을 승강기를 타고, 그만큼 밟았을 현관 앞 서너 계단을 내려서서 정동길을 걸을 것이다. 얼마간 걸어가다 뒤돌아서서 회사 건물을 오랫동안 바라볼 것이다. 그날 아쉽지 않고, 서글프지 않고,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진기자 생활이 만 21년이 넘어섰다.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좀 몰아붙였던 것 같다. 때론 과한 욕심을 부렸고 날카로운 경쟁심을 벼리며 살기도 했다. 질투와 미움이란 감정도 자꾸 섞였다. 진작 분노해야 할 곳보다 나 자신에 분노하는 일도 잦았다. 그 결과로 뭘 더 이루었나. 따지자면 미흡했고 후회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이쯤 하자며 멈췄다. 휴가지에서까지 날 다그칠 필요가 없고,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부질없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 필요한 말은 내게 “그간 잘 해왔다”고 해주는 것이었다.      


제주 살이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뻣뻣했던 목덜미에 긴장이 풀렸고, 욕심도 걱정도 그다지 내게 추근대지 않았던 날들. 한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이어서 가능한 걸까. 다시 뭍의 삶, 서울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잔잔하고도 벅찬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살았던 날들이, 한낱 가상의 날이자 꿈의 삶일 뿐이었을까.

우도 올레 구간은 11km가 조금 넘었다. 적당히 낀 구름이 더위를 좀 누그러뜨렸다. 길의 기운은 걷는 이를 들뜨지 않게 하고, 오히려 달래듯 가라앉히고 있었다. 섬의 섬이라는 공간에 스며들지 못한 육지사람에게만 닿는 느낌일까. 제주 땅과 사람들의 가슴에 흐르는 말 못 했던 현대사의 상처도 한몫하고 있으리라. 어쩌면 이런 기운이, 차분해져서 자기 안을 들여다보게 하는 여행의 최적지로 제주를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겠지.


우도에서 다시 일출봉을 바라봤다. 우도 기준으로 본다면 일출이 걸리거나 일출을 볼 수 있는 방향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도는 저 봉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일몰 방향이니, 일몰봉쯤 불러도 되리라.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시선의 기준, 관점의 바탕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시선은 어디에서 왔을까, 타인의 시선으로 살지 않았던가. 가볍지 않은 질문이 옆구리를 훅 찌르며 들어온다.    

평대로 돌아왔다. 한달살이의 마지막 주말이다. 저물녘 석희삼춘에게 전화해 막걸리를 청했더니, 농사일이 늦게 끝난다고 했다. 밤에 연락할 테니 백사장 옆 방파제로 나오란다. 밤바다의 방파제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이들의 실루엣이 수를 놓고 있었다. 가스등을 켜놓고 앉은 석희삼춘과 일행이 반겨주었다. 평대에 놀러 왔다 삼춘의 마을투어에 참가한 시나리오 작가, 한달살이를 하다 아예 정착한 댄서 출신 청년, 역시 평대에 왔다가 돌담에 애착을 갖고 주저앉은 목수 등이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환하게 웃었고,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였고, 서로를 위로했다. 평대에서의 추억과 “오라”는 권유의 말과 “올 수 있을까”하는 주저의 말, “오고 싶다”는 기대의 말이 돌고 돌았다. “한 번 오면 잊지 못해서 또 오게 돼요.” 석희삼춘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침개를 부쳤고, 삼겹살을 구웠고, 한치를 바닥에 잔뜩 깔고 라면을 끓었다. 낚싯대를 드리운 이들이 주위에 여럿이었으나 “잡았다환호 하나 없이 고요했다. 차박족들이 작은 불을 밝힌  바다를 향해 술잔을 들었다. 어둠이 내린 마을일찌감치 정적이 휩싸였지만, 방파제만은 살짝 들떠 있었다.


살면서 만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던 이들이 평대에서 인연이 되는 순간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아닌가. 저마다 발그레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대가 더 깊이 친근해졌던 밤이다.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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