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25일째
석희삼춘의 낯익은 트럭이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딜 오셨나 보니, 민박집과 돌담을 사이에 둔 옆집인 듯했다. 청년들의 떠들썩한 웃음이 한 번씩 새어 나오던 곳이다.
마당 건너 조그만 사무실로 고쳐 쓰는 바깥채를 들여다보니 삼춘이 청년들과 대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석희삼춘이 손짓을 해서 자리에 잠시 끼어 앉았다. 인사를 나눴고 여차저차 한 달 살이 중이며, 가끔 웃음소리 듣고 궁금해했다며 친근감을 드러냈다. 평대의 시공간에 함께 있다는 건 놀라운 인연이다.
청년들은 그룹 ‘짓다’의 구성원들이다. 이날 제주 소식지에 섬에 정착해 다른 삶을 꿈꾸는 청년들에 대한 소개의 글을 엮었는데, 그중 한 집단이 ‘짓다’였다. 발간을 앞둔 교정본을 펼쳐놓고 내용과 표현 등을 삼춘과 살피던 중이었다. 권하기에 몇 단락을 읽었다. “농사를 짓고, 문화를 짓고, 관계를 짓는다”는 문장이 쏙 들어왔다. 어떤 상황이, 어떤 성찰과 사유가 이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였을까.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이 시작한 많은 멤버들이 있었지만, 먹고사니즘 앞에서 좌절하거나, 다음을 기약하고 떠났다고 했다. 지금 세 명이 전부고, 나이와 참여시기는 달랐지만 공동대표직을 맡고 있었다.
가치 있는 삶을 실험하다가 먹고살기 위해 떠났다는 말에 뒷맛이 약간 썼다. 화살은 곧 내게 돌아왔다. 난 그 나이에 사는 것에 대해 어떤 치열한 고민을 했던가. 이제 스물이 된 딸아이에게 이 청년들의 도전을 권할 수 있을까. 아이가 그런 삶을 꿈꾼다면 온전히 응원할 수 있을까. 청년들이 현재 삶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는 건, 나약해서가 아니라 나 같은 기성세대들의 무책임 탓이 크다. 이런 세상을 적극적으로 구현해 놓았거나 적어도 방조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다. 정상 사회가 아니므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쌍수를 들고 찬성하면서도, 정작 내 아이는 이 모진 세상을 견디고 이겨내길 바라고 있다. 이런 이중성을 어찌해야 하나.
평대에서 대안적 삶을 개척하는 이 청년들을 가만히 응원할 뿐이다. 찐농부 석희삼춘과 농사일에 대한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도로가 넓어지고, 차가 많아지고, 건물이 높아지고, 사람이 많아지고, 소리가 커졌다. 도심을 구성하는 것들이 피부를 포함한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데 낯설고 버거웠다. 과했고 넘쳤다. 새삼 휴대폰 매장은 왜 스피커를 밖으로 내놓고 최신곡을 그렇게도 크게 틀어대는 걸까. 좋은 노래도 소음이 돼 버리고 만다. 듣지 않을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 것이 도시를 지배하는 룰인 것 같다.
애월읍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L선배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는 소길리에서 ‘섬타임즈’라는 책방을 운영한다. 선배는 여러 권의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바로 며칠 전에도 신간이 나왔다. SNS를 통해 출간을 알았고, 선배는 나의 제주살이를 알게 됐다. “시간되면 놀러 오라”는 문자를 씹을 수가 없었다.
L선배와 남편이 책방에서 반겨주었다. 기자생활을 오래했던 선배는 여행을 많이 다니며 살았다. 남편은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둘은 마흔이 넘어 만났고, 선배는 남편이 사는 제주로 왔다. 7년째 섬살이를 하고 있다. 두 부부는 작가다. 책방을 운영하고 매일 글을 쓰고 책을 내며 산다.
부부는 제주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육지사람에서 섬사람이 된 부부와 그런 섬살이를 조금 동경하게 된 육지사람의 대화는 전방위적으로 펼쳐졌다. 이주와 정착, 작가로 살기, 글쓰기, 날씨, 코로나, 환경, 먹고사는 일 등. 모든 대화의 행간에서 부부는 “살 만하다. 오고 싶으면 결단하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진으로 할 게 많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선배 남편은 확신했다. 소길에 한달살이 온 사람이 아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지금은 제주에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의 사진을 찍는다고 정신이 없단다. 해녀복장의 콘셉트 사진이 인기라고 했다. 회당 얼마라는 말을 듣고 계산을 돌린다. 헐렁하게 셈을 해봐도 지금 벌이보다 낫다. 솔깃했다. 그는 “기술이 있으니 충분히 벌어서 먹고 산다”고 했다. 사진기자의 일을 ‘기술’이라고 간단하게 얘기하면 불끈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기술이라는 거라도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었다.
부부의 주입과 설득이 계속됐다. “욕심 버리고, 조금 불편한 걸 감수하면 제주에서 삶은 크게 만족할 거예요.” 이어 책방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안내했다. 안채와 바깥채와 창고로 이뤄진 전형적인 구조의 집이었다. 내부를 깨끗하게 고쳤고 뜰에는 갖가지 꽃나무가 피어 있었다. “여기 한 번 보실래요.” 선배 남편이 앞장서서 옥상에 올랐다. “이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주 도심이 그리 멀지 않게 내려다보였고, 뒤로 바다가 불룩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조망을 가진 집에서 살면 좋겠지?’라는 자랑이자 유혹이었다.
부부는 좀 더 나은 환경과 일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그걸 제주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휘둘리며 살지 않는 자들의 행복이 표정에 가득했다. 내게 그런 삶을 살갑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한 달 제주살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도의 의지를 소유했다면 어느 정도 자격과 자질이 보인다는 것처럼.
한나절 내내 보여준 선배 부부의 따뜻한 환대에 깊이 감사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도 좋다”던 부부에게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평대로 돌아오는 동안 제주로 삶의 공간을 옮기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참 좋은데.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현실이 쉽게 허락을 할까. 기대와 회의가 엉겼다. 서울에 살며 붙들고 있는 것들, 놓으면 불안해지고 말 것들이 떠올랐다. 알만한 매체의 기자라는 알량한 타이틀부터 말이다. ‘나는 누구’라고 할 때 명함이 곧 나를 말하는 것처럼 내밀어왔다. 어쩌면 당장 내밀 명함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돼버릴 것이지만, 나는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명함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
제주에 정착해도 살 순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상상한 것으로도 놀라운 진척이다. 서울로 돌아가서 살아가는 중에도 문득문득 이 가능성을 타진해 볼 것이다. 그런 빈도가 잦아진다면 딱 고만큼씩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겠지.
이 매력적인 섬으로의 이주에 발가락 두어 개쯤은 담그고 온 것 같다. 부부의 얘기에 빠져들다 보니, 한 2년쯤은 제주에 산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 작은 벌이를 하고, 제주의 자연을 찍고 그에 딸린 글을 쓰며 사는 소박한 삶을 상상하고 있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