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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Oct 04. 2021

장발의 청년 사장을 본 것도 같다

<슬기로운 평대생활> 24일째

시간은 어떻게 이런 식으로 흘러버리는 걸까. 달달한 휴가가 일주일 남았다. 출근 날이 딱 고만큼 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심하면서도 즐거웠던 시간이다. 무료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날들이다. 이렇게 모순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 ‘오늘은 뭐하지?’로 시작하는 하루하루가 유쾌하다.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기분 좋은 나른함과 주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감각할 수 있는 여유가 좋다.


저만큼 물러나 있는 생각과 감정들이 있다. 하루가 헐거운데 걱정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에 대한 고민들을 오늘로 당겨 쓰며 전전긍긍하는 일이 드물었다. 사로잡히는 격한 감정들에 거리 두는 일이 가능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 주어진 시공간과 외부로부터의 상황에 내 몸과 맘을 맞춰가는 건 썩 괜찮은 경험이었다. 비워지고 채워지는 것들이다.    


제주 한달살이가 흔했고, 나도 거기 편승한 건 부인하지 못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한달살이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그 살이들이 뭉뚱그려져서 ‘유행’이라는 단어에 묶이는 건 어쩐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다. 밖에서 볼 땐 흔하고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막상 와서 사는 개개인에게는 고유하고 특별해질 수밖에 없는 경험일 것이다. 회사를 다니며 한 달 휴가를 얻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이런 기회가 애초에 불가능한 이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지고 만다.  

올레 19코스를 걸었다. 해안을 따라 위쪽으로 가는 길이다. 함덕에 이르러 후배가 알려준 맛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의 제주살이 소식을 들은 후배는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맛집과 책방올레를 카톡문자로 보내왔다. 올레길에서 많이 벗어난 중산간이어서 갈까 말까 망설이긴 했다. 후배의 정성을 생각했다. 딱 한 군데만 가자. “네가 추천한 집 맛있더라”라고 한마디는 해야 도리일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관계라는 건 이런 자잘한 것들로 이뤄진다.        


물가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700번 대의 버스를 타야 했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남은 도착시간이 뜨지 않는다. 와야 오는구나 싶은 버스가 700번 대의 버스였다. 빼곡하게 적힌 정류장을 한참 돌아가는 701-1번 버스에 올랐다. “어서오세요~” 버스기사님의 목소리는 ‘난 이 일이 아주 즐거워요’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어요’라는 듯이 경쾌했고, 흘깃 본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노선의 중간 지점인 중산간에 차를 대놓고 10분 간 쉬었다. 기사님이 먹거리와 볼거리를 추천해 주신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제주는 버스 타고 걸어서 봐야 제 맛이에요. 버스에서 보는 뷰는 승용차와는 또 달라요.” 조금 전 이곳으로 오르며 본 버스 밖 풍광이 그의 말을 이미 증명하고도 남았다. 운전대를 놓고, 조금 다른 시선으로, 속도를 늦춘 채 온전히 바라보는 풍광이었다. 느긋한 말투에 주변 분위기가 어우러져서인지 인생 선배가 들려주는 교훈처럼 들렸다.  

승객 없는 버스 안에서 기사님과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6년 전에 제주에 왔다가 눌러앉았다고 했다. “어떻게 정착하게 되셨어요?” 반사적으로 그 과정을 묻고 있었다. ‘여기 와서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친구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그 일이 잘 안 되는 바람에 다른 일(버스)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복잡했을 얘기를 간략하게 답하는 동안에도 그의 표정은 차량 거울 속에서 내내 밝았다. “아...그랬군요.” ‘잘 안 됐던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더 질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제주가 참 좋아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좀 더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연 맛집이라 맛은 있었다. 주변 마을을 한 바퀴 돌았고, 걸으며 마주친 사람들보다 맛집을 드나드는 손님 숫자가 더 많았다. 밥만 먹고 서둘러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듯했다. 생소한 질문이 솟는다. 도대체 맛집이란 무엇인가.     


평대로 돌아왔다. “내 집 만한 곳이 없구나” 중얼거렸다. 티셔츠를 하나 살까 싶어, 동네 골목에 있는 한 빈티지 숍에 들렀다. 옛집 틀을 그대로 두고 쓰는 이 가게 자체도 빈티지인 셈이다. 산책하며 두세 번쯤 지나갔었는데 매번 문이 잠겨 있었다. 문 앞에는 ‘일단 멈, 멈추시오’라는 문장에서 몇 글자를 강조해 멀리서 보면 ‘일단 춤 추시오’라 읽히게 만들어 놓았다.    

옷이 잔뜩 걸렸고, 벽이 꺾여 들어간 곳에서 주인장으로 보이는 청년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장발의 남성이었고,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입어보셔도 돼요.” 상냥한 목소리에 비해 무심한 표정이었다. ‘일단 춤 추시오’는 저 청년의 개그였단 말인가. 그는 하던 스팀 다림질을 계속했다.   


문 닫는 시간이 한 시간쯤 남았는데 코로나 방역 차원에서 쓰게 한 출입명부는 10칸도 채우지 못했다. 이들 중 한두 명은 뭐라도 샀을까. 가게를 유지할 수 있나. 온라인 매출로 충당이 되려나. 벌이와 결부된 오지랖성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한 문장씩 지나갔다. 이 청년은 어떻게 평대까지 오게 됐을까. 장발과 문신에 기댄 편견이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때 민망해 고개를 한 차례 크게 털었다. 이래서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가보다. 좀 부끄러워졌다. 세상의 편견들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갈 때, 나는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며 반성했다.     


청년 사장이 지금,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오롯이 몰입하며 삶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빈약한 상상력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저물녘 물가에 앉아 서쪽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둑해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향하다 저만치 백사장에서 서너 명의 동네 청년들의 실루엣을 본다. 텐트 앞에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놓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낭만, 자유, 음, 여유… 같은 좋다 싶은 단어들이 경쟁하듯 엉겼고, 솔직히 부러웠다. 짧은 시선을 던진  길을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다가 문득 떠올렸다.


청년들 사이에서 장발의 사장을 본 것도 같다.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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