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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Sep 29. 2021

머물다 보니 정든 것들이 많아졌다

<슬기로운 평대생활> 22일째 

생각해보면 내게도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휴가긴 하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미련하게 자꾸 묻는다. 이러저러한 이유 몇 가지를 꼽아보지만, 그럴 때마다 뭔가 미흡했다. 가령, 제주가 좋아서 왔다는 것이 내가 말하기도 했던 이유이지만, 그렇다고 ‘제주’가 좋아서 온 것은 아니다. 쉬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지만, 마냥 쉬고 싶어 온 것도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내 안의 말은 이런 식이었다.  


어떤 이유를 대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떠나고 싶었다’는 문장에 멈췄다. 사실, ‘떠나고 싶어서’라는 말 자체는 막연하다. 하지만 떠나고자 했던 ‘대상’을 찾게 된 것이다. 문장의 목적어를 찾은 것이다. ‘집을’ ‘회사를’ ‘서울을’도 아니었다. 진짜 떠나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이지 않았을까. 외부의 시선으로 이래저래 규정이 된 ‘나’, 그 틀 안에서 주어진 역할들을 연기하는 것 같은 ‘나’, 누구의 시선을 쉴 새 없이 의식하며 사는 ‘나’라는 사람의 지긋지긋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관계와 장소에서 멀어지는 일이 휴가나 여행의 궁극적인 맛이요, 낭만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런 생각도 참 낯설다.  

깊이 잠들어 늦도록 잤다. 걸으며 쌓였던 피로를 푸는 몸의 자정작용인 셈이다. 날씨가 좋았다. 휴가의 3분의 2가 지나갔구나. 평대의 날들은 쌓일수록 가속이 붙었다. 지금 최고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다. 아침 바닷가 산책을 놓친 것이 아쉬웠다.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소하다 싶어 지나쳤던 장면과 순간이 문득 떠올라 복기하다 보면 결국, 사소하지 않은 것이 돼버리고 만다. 도리 없이 놓치고 지나칠 것들에 대해 버릇처럼 아쉬워할 것이다.  가볍고 느슨했던 마음이 쪼이고 강박이 다시 고개를 든다. ‘버려라. 욕심이고 집착이다.’ 내 안의 어떤 자아가 따지듯 외쳤다.    

평온하고 한가로운 날들이다. 외양으로 보면 공간이 많이 비어있는 허술한 하루 같지만, 오히려 가득 채워진 하루하루를 감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도 느닷없이 떠오르고, 머물고, 사라지는 상념 중에 어떤 것은 은근한 긴장을 유발하기도 한다. 생활이 간결해지니, 생각과 고민과 감정이 여과 없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휴가든 여행이든 한 동네에 열흘 이상을 머문 적이 없었다. 평대에서 한 달을 살기로 결정했을 때 “뭘 할 거냐?”라고 물어오면 “동네사람처럼 지낼 것”이라고 반복해 말했다. 지난 20여 일을 여행자보다는 거주자처럼 지내길 바랐는데 이도 저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이지 않았나 싶다. 그날그날 나와 주변의 리듬에 맡긴 채 지냈다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머물다 보니 정든 것들이 많아졌다. 등대와 백사장, 방파제와 해녀작업장, 집 앞 골목과 돌담, 돌담 아래 핀 수국들, 골목 삼거리의 폭낭(팽나무), 밥집의 고양이와 옆집 개, 바닷가 편의점과 소박한 카페, 해변을 따라 오목하게 들어선 마을의 윤곽과 그 뒤의 오름, 아침바다, 파도의 옅은 비린내, 바람의 촉감, 지붕 때리던 빗소리와 저물녘의 하늘. 내 삶의 자리에서 맥락 없이 떠오를 것들이다. 그리고 부석희 형님.   

평대에 지내는 동안 작지만 좋은 습관 같은 걸 만들어 보려 했다. 일어나 아침 먹기 전 산책과 저물녘 평대 해변 백사장에 자리 깔고 앉아있기다. 이 가벼운 루틴들이 날 채워주었다. 위안 이상의 위안이었다. 아무리 거주 환경이 달라졌다 해도 ‘내가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도취가 일어나곤 했다. 아늑한 시공간 속에서 유통기한 지난 감정들도 폐기되기를 바랐다.   

읽던 책에서 “홀로 있어 완전함의 경지”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게 정확히 어떤 수준의 경지인지 알 수 없고, 홀로 완전해지기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해변에 앉아 황혼의 하늘과 바다를 살피고 있을 때의 내 마음의 상태가 그나마 ‘홀로 완전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 아닐까.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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