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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Sep 27. 2021

여운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슬기로운 평대생활>  21일째

성산읍 온평포구에서 시작하는 올레 3코스 길 위에는 역시 인적이 드물었다. 어쩌다 한 명이 지나가면 반갑기 그지없다. 저만치 걸어오는 한 남성이 보였다. 큼직한 배낭을 멨고 성큼성큼 걷는 보폭이 컸다. 까만 옷이 가리지 못한 팔다리가 새까맸다. 코스의 반대쪽 끝에서 시작했다면 오전 내내 걸었을 것이다.


날은 뜨거웠고 땀에 쩐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그가 걸으며 가르는 공기엔 시큼한 땀내가 배어있는 듯했다. 줄이고 줄여 최소한의 것만 챙긴 것이 분명함에도 배낭은 묵직해 보였다. 더 가까워지자 마스크 위로 드러난 까만 얼굴이 지친 듯 무표정했다.     

아마도 내가 저만치 걸어오는 그에게 시선을 던졌듯이 그 역시 내게 시선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몇 걸음 앞에서 서로의 눈길이 만나는 순간, 그는 눈가에 주름이 선명해질 정도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왔다. 마스크에 익숙해져서 표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금 오버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네, 수고 많으십니다~”하고 답을 했다.


반가웠던 걸까. 몹쓸 ‘짐작병’이 발병하고 만다. 그 사람의 얼굴을 길어야 2초쯤 가까이에서 봤을 뿐이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얼굴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이 여행자의 스토리를 내 멋대로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는 군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머리가 여전히 짧았고, 군용 ‘따블백(더플백)’ 보다 큰 배낭을 짊어질 생각을 한다는 건 남아있는 군인 정신이다.


그는 아마도 장교로 7년쯤 장기복무하다 제대를 했을 것이다. 20대 초중반의 얼굴은 아니었다. 제대 전후 몇 군데 취업원서를 넣었고, 그중 한 회사에 면접을 봤고 취업에 성공했다. 면접을 앞뒀다면 저렇게 얼굴을 새까맣게 태울 리 없다. 첫 출근까지는 한 달 가까이 남았고, 제주 올레 일주를 결심했다. 군대 물을 빼기 위해서는 걷기만 한 게 없었다. 군대 간부의 시간을 정리하고 말단 사원으로 새 출발의 각오가 필요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올레를 ‘걷는’ 사람들은 서로 알아본다. ‘거니는’ 사람과 ‘걷는’ 사람의 걸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선크림을 발라도 어쩔 수 없이 얼굴과 팔다리가 검붉게 탄 사람들은 길 위에서 ‘연대감’ 같은 걸 느낀다. 감염병과 더위에 걷는 이가 드물어서인지 올레에서 마주치는 이들이 반가웠다. 자신에 집중하며 나름 고독하고 외롭다 느끼며 걸어가는 중에도, 아주 잠시 스치는 만남과 짧은 인사가 힘이 됐다. 거기에 위로가 있었다.       

삶의 배경도, 현재의 자리도 제각각인 이들이 올레를 걸어야겠다 결심한 마음과 걸으면서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잊힌 기억들을 소환하고, 때론 비우고 때로 채우며 풀어놓는 마음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새삼 읊조려보는 ‘길’이라는 단어와 ‘길을 걷는다’는 문장이 결연하면서 숭고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길에서 만나는 누구든 그저 응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전해진다고 믿었다. 길 위에서 타인에 쓰는 마음은 그대로 내게 돌아오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응원과 격려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것이다. 마스크가 가릴 수 없는 눈언저리의 주름진 미소는 그런 마음들이었다. 내게 그런 마음을 기꺼이 보내준 길 위의 ‘동지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곱씹을수록 뭉클하다.  

걷다 보니 올레 설계자의 의도를 짐작할 것 같고, 때론 코스의 세심함에 감사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걷기가 즐겁고 설레는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전역에 26개의 코스가 만들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새삼 ‘그렇게나 많아?’라고 속으로 작게 말했다. 환경을 고민했다 하더라도 코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필연적으로 깎이고 뚫리고 파헤쳐진 것들이 많았을 텐데…. 별 도움 안 되는 걱정을 보탰다.


사람들이 걸어서 얻는 것 이면에 그게 아무리 최소화했다손 치더라도 망가진 자연과 그곳에 깃들 생명의 가치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다. 원형의 자연이 훼손됐고 그렇게 만들어진 길에 내가 있다는 것이, 내 걸음이 또 그만큼의 훼손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 씁쓸한 진실이다. 가벼운 혼란이 일어났다.    


온평리와 신산리 일대에는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는 깃발이 해안을 따라 걸려 있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파닥파닥” 소리 내며 나부꼈다. ‘OUT 제2공항’이라고 새겼던 노란 깃발은 실밥이 바람에 한 올 한 올 풀리며 떨어져 나가 ‘T’와 ‘공항’자가 지워졌다. 이곳 마을 주민들이 반대해온 시간이 깃발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다.

걷는 내내 햇살이 강렬했다. 바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뜨거웠고 지쳤다. 코스의 절반 정도에서 걸음을 돌렸다. 지쳐도 꾸역꾸역 걷는 일이 한달살이에, 그것도 휴가 중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민박집으로 돌아가는 201번 버스에 올랐다. 버스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제주 제2공항을 건설해야 하는 이유를 지겹도록 홍보하고 있었다. 제주를 찾은 이들이 많아져서 새 공항이 불가피하다는 설명도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공항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지지하는 입장인데, 온전한 자격을 얻으려면 제주를 찾지 말거나 덜 찾아와야 하는 것인가. 내가 이곳에서 먹고 싸고 쓰고 버린 쓰레기가 이 섬에 오래오래 남겨질 거라 생각하니 역시 좀 혼란스러웠다.    

해거름의 구름이 바닷가로 불러낸다. 바라보면 빨려 들어 잡념이 하얗게 지워지고 마는 그런 하늘이었다. 몸뚱어리 전체가 눈동자가 되어 중에 오로지 시각만이 남겨진 순간이다. 하늘과 구름의 모양과 빛깔이 바뀌어가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시선의  나갔다고 해야 할까.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색은 어둠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하늘에 머물며  여운으로 머물렀다.


여운을 가진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훗날 평대를 그리워하게 된다면(아마도 그럴 것이지만) 그 이유의 7할은 저물녘의 하늘일 것이다. 오늘 행복했다.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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