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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Oct 15. 2021

착즙한 수국은 어떤 맛일까

<슬기로운 평대생활>  28일째

확실히 시간은 조금씩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회사에서 규정한 은퇴까지 남은 시간은 10여 년. 지금까지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를 거다. 십수 년이 지난 사진을 보게 될 때면 세월의 자비 없는 속도에 놀라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가차 없이 흘러갈 시간을 생각하면 당황스럽고 아찔하기까지 하다. 세월 앞에 평상심을 유지할 순 없을까. 영원한 숙제일 것 같다. 제주에 머물고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올려 본 단어가 ‘은퇴’ 아니었을까. 지금 바로 이 순간도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의 구체성을 띠기 때문일 것이다.  

평대에 오자마자 마냥 신나서 발길 가는 대로 디뎠던 해안길을 그대로 다시 걸었다. 여행이든, 글이든 마무리가 있어야 하는 것들은 왠지 시작과 끝을 비슷하게 맞춰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랄까. 이런 걸 국어시간엔 ‘수미상관’이라 했던가. 길게 걸으며 지난 한 달을, 꽤 괜찮았던 제주살이를 짚어 보려는 것이었다. 


바다를 끼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익숙해져서인지 정겹다. 어디쯤 뭐가 있고, 뭐가 나타날 때가 되었고, 어디까지는 어느 정도의 거리라는 감도 생겼다. 모르면 그저 그냥 걸어갔을 길이지만, 안답시고 빤히 예측할 수 있으니 한편, 시시해지고 귀찮아지는 점도 있었다. 땡볕이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걷는 동안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상념들의 즐거움은 차치하고라도, 걸음을 부추길 또렷한 목표지점이 필요했다. 그래 ‘종달미소’로 가자. 8000원짜리 한식뷔페로, 앞서 한 차례 갔었고 맛과 양으로 크게 만족했었다. 대체로 가볍게 먹어 약간 배고픈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터라, 많이 걸어서 허기를 보태면 이보다 더한 식사는 없을 것이다. 나를 위한 제주의 마지막 ‘만찬’ 장소로 낙점했다. 의미를 부여하자, 몸에 새 에너지가 공급된 것처럼 걷는 게 수월해졌다. 햇볕에 노출된 살갗이 쏘인 듯 따끔거렸지만, 이런 몸의 감각도 곧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펼쳐지는 풍광과 스쳐가는 공간들을 다시 눈여겨본다. 사람뿐 아니라 공간과 드는 정 역시 깊어질 수 있다. 마을마다 반복되는 해녀들의 작업장과 물에서 나와 불을 쬐던 불턱, 바다에 기도하는 용왕당을 지났다. 바다의 것으로 먹는 사는 사람들과 태곳적 신비가 어린 위엄의 바다. 물가의 사람들에게 삶인 바다는, 친근함보다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인 듯했다. 바다에 몸을 담그며 사는 이들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먹을 만큼만 주시라’는 평대의 어느 시비에서 읽은 소박한 바람이 기억났다. 대자연 앞에 욕심 없이 작은 사람들이지만, 영위하는 삶 앞에선 큰 사람들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말에 드러나는 것 같다. “살암시민 살아지매”(살다보면 살아지게 된다). 나약한 삶의 태도가 아니었다. 죽음과 상실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이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제주 사람들, 특히 해녀들의 운명이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이는 바다만큼, 자연만큼 위대하다. 잠시 먹먹해진다.  


종달리로 향하는 내내 먼바다와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흐린 날씨에 하늘색과 바다색은 또 다른 조합의 색을 이뤘다. 서로 반영돼 매번 같을 수 없는 색의 조화를 마치 새로운 발견인양 얕은 사유를 이어갔다. 하늘색과 바다색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모호하다. 무엇이 하늘색이고 무엇이 바다색인가. 어떻게 그 색을 규정할 수 있나.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약속된 단어처럼 특정색의 단어로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제주에서 본 하늘색은 내가 알아야 했던 그 하늘색이었던 적이 없고, 내가 알아왔던 바다색은 제주의 바다를 보며 지워버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 두 색은 고유한 색을 지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정된 색이 아니라 움직이는 색, 상태의 색이 아닌 동작하는 색의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정의하기가 불가능한 색이요, 당신이 바로 지금 바라보고 있는 하늘과 바다가 지니고 있는 색, 보는 이의 눈에 읽히는 그대로의 색이 하늘색과 바다색일 것이다. 알고 있던 색을 모르게 되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답처럼 생각했던 것이 처음부터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어설프게나마 깨닫게 됐다. 이런 것을 통찰이라 할 수 있을까.  

길게 이어진 수국 길을 지날 땐 즉시, 시집 하나를 떠올렸다. 제주에 오기 전 ‘제주’가 들어가는 책이면 일단 손이 갔다. 그렇게 읽게 된 독특한 시집이었다. 제주에 사는 시인 이원하의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발랄한 제목의 시집에서 시인이 유월 종달리의 수국을 노래하기도 했다.  


“유월의 제주/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시인이 가닿는 생각은 상식과 해석의 범주 내에 있지 않았다. 근데 착즙한 수국은 무슨 맛일까. 시인은 종달리에 살고 있는 걸까. 그런 것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다니는 곳마다 수국이 ‘수국수국’ 만발하기 시작한 때에 왔는데, 이제는 꽃잎들이 누렇게 변색돼가고 있었다. 뭐 시들었다고 수국이 아닌 것도 아니고 꽃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피고 시들고 지는 과정이 꽃이며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사람도 삶도. 


그나저나 시든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어 즙을 짜서 마신다면 도대체 무슨 맛일까. 그런 수국의 즙 같은 말투는 또 어떤 것일까.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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