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부터 매년 이어진 페르 라쉐즈(Père Lachaise) 아틀리에 오픈데이는 화가, 사진작가, 조각가들이 본인의 작업실을 대중에 공개하고 더불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사일 간의 축제이다. 페르 라쉐즈는 짐 모리슨, 쇼팽, 모딜리아니 같은 예술가들이 묻혀있는 파리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로 유명한 동네인데, 이 주변은 싼 집값 때문인지 주머니 가벼운 예술가들의 작은 아틀리에들이 많이 있나 보다. 56명의 예술가들이 이번 2012년 오픈데이에 참여했는데 나와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은 어떤 오브제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막연히 예술가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도 컸다. 동네는 달라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하루 일과는 어떠할지, 회사 생활에 지치듯 가끔씩은 본인의 아틀리에가 너무나 답답해서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은지. 일 년에 몇일의 휴가를 갖고, 일정하지 않은 수입에 대한 스트레스는 어떻게 다스리는지. 방청소, 설거지, 세탁은 얼마나 자주 하는지, 밥은 시간 맞춰 삼 시 세끼 다 먹는지… 이런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아틀리에에 전시된 작품들도 둘러보지만, 그 사이사이, 방구석구석 놓인 와인잔, 포크, 접시들, 작은 가구들, 전시장으로 쓰인 거실 뒷 편의 부엌을 둘러보는 것이 오히려 재밌었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 스쿨을 구성해서 미술계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몽파르나스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금 페르라쉐즈 아틀리에에 모여 사는 이들처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당시에는 피카소, 모디글리아니, 유틸로, 수틴 등의 작가들이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브라세리에서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작품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저 르누아르의 복숭아 빛 볼을 가진 소녀 초상화를 사랑했던 나의 막연한 그림 감상 방식에서 제동을 걸어 준 전시회가 하나 있었는데, 피나코테크( Pinacotheque de Paris)에서 열린 Modigliani, Soutine and The legend of Montparnasse라는 전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네터 (Jonas Netter)는 알자스 출신의 중산층 미술 수집가였는데, 당시 가장 비싼 값을 쳐줬던 인상파 회화에서 눈을 돌려 최초로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수집한 사람이었고, 이 전시에서 그의 40개가 넘는 개인 소장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오랑주리 미술관 상설전시장에 가면 맨 처음 보게 되는 러시아 상인 모보 스키 (Leopold Zborowski)의 방 모형에서도 보여주듯, 그 시대에 화가의 작업을 알아봐 주고 구매해주는 후원자가 없다면 사실 상 화가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생활고에 닥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전시는 단순히 예술인으로서의 화가가 아닌 직업인으로서 화가의 애환과 어려움에 대해 처음으로 접한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피카소는 살아생전에 이미 그 명성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기도 했던 반면, 오늘날 잘 알려진 모디글리아니는 이태리 출신으로 프랑스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으나 죽을 때까지 아내의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극한의 빈곤을 거치며 결국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 길에서 요절하는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다. 후세에 크게 인정을 받고 길이 남는 미술 작품을 남겼지만 인간의 삶으로서의 모디글리아니는 정말 불행했던 사람인 것이다.
이 전시에는 그림과 더불어 화가와 수집가가 서로 주고받은 서신들이 함께 전시됐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니 일반적으로 선금 형태로 그림 값을 사전에 받은 화가들은 실제로 한 달에 네다섯 편의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즉, 주제를 잡고 고민하고 영감을 얻어내고 최종적으로 그림을 완성해 내는 모든 과정을 약 5일의 시간에 마쳐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그림을 바로 다음 5일 간 완성해야 하고, 계속 이렇게 쉴 새 없이, 휴가도 없이 그렇게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이것은 사실 노동 착취에 가까운 수준이 아닌가 생각한다. 화가의 인권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던 것일까. 이러한 부조리한 미술 시장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페르 라쉐즈에는 한 달에 오 육백 유로 정도의 월 하숙비를 ( 공동묘지 옆에 있는 이 지역은 파리 중심가에 비해 방값이 절반 정도 한다고 볼 수 있다.) 감당해내며, 자신의 그림 철학을 끗꿋이 지켜가는 예술인들이 살고 있다. 당장 나보다 더 많은 그림을 팔고 미술계의 인정을 받는 같은 시대의 미술인 동료들에 꿇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팽팽한 신경전을 초월해 자신 만의 철학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 미술 산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는 없지만 100년 전 모디글리아니, 피카소, 유티 노가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자존심을 건 대결을 펼쳤던 그때처럼, 페르라쉐즈의 작은 골목 어느 카페에서는 각자의 그림 철학을 토론하는 미술학도들이 오늘도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 삼 유로의 값싼 포도주로 끼니를 때우고 있을지 모른다. 아틀리에 오픈 내내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해 좌절을 겪을지라도 몇 달 치 집세가 밀려 언젠가 길거리 노숙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할지라도 나 만의 작품 세계를 믿는 오늘날의 모디글리아니들은 100년이 지나고 어느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혹은 페이스북 클라우드 펀딩과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으로) 빛을 본 작품들이 후세에 길이 남아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다시 새하얗게 정돈해주는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겠지.
파리는 과거에 사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오래되고 냄새나는 싸구려 빌딩에서 엘리베이터 없이 칠 층의 집을 오르내리며 자신의 그림에 혼신을 다하는 그들이 바로 오늘을 사는 피카소와 모디글리아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