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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Aug 28. 2024

인생의 길동무


“할머니 학교 다녀올게.”

나는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왔다. 할머니에겐 학교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 뒤뜰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했다. 내가 9살이 되던 해 엄마가 행방불명 되고 다음 해 아빠도 선박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할머니는 나에게 부모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는 어디가서 부모 없이 자랐다는 소리 듣지 말아야 한다며 없는 살림에도 나를 꼭 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난 할머니의 바람대로 학교에 잘 다닐 수가 없었다. 엄마의 행방불명을 핑계로 부모 없는 아이라고 놀리는 친구들의 장난스러운 농담이 싫어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 가기 싫어서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밖에서 대충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치 혼자만의 연극을 했다고나 할까. 오늘도 난 평소처럼 집 뒤뜰에서 시간을 보내다 하교 시간에 맞춰서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나는 할머니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놀았다. 그러다 갑자기 할머니가 변소에 온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집 뒤뜰 벽으로 몸을 숨겼다. 변소가 집 바로 옆에 있어 자칫 잘못하면 뒤뜰에 있는 내 모습이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는 몸을 숨긴 채로 할머니의 행동을 더 살펴봤다. 고개만 살짝 내밀고 할머니가 변소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후 변소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인기척에 살며시 내다보았다. 다행히 할머니는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날 오후 나는 하교 시간에 맞춰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오늘도 학교에 다녀온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는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 수업은 어땠니? 재미있었니?”

궁금한 게 많은지 할머니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냥, 맨날 똑같아.”

나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거짓말이 들키지 않게 얼른 말을 덧붙였다.

“얼마 전에 우리 반에 새로 전학 온 친구 있거든? 근데 걔가 나랑 같이 앉게 됐는데 계속 자기 책상 넘어오지 말라고 괴롭혀.”

나는 얼마 전에 새로 전학 온 친구와 다퉜던 생각이 나서 말했다.

“왜? 이유 없이 그냥 괴롭혀?”

“몰라, 나랑 같은 책상에 앉은 날부터 그냥 계속 시비 걸어서 한번 싸웠어.”

“싸웠어? 언제?”

“좀 됐어......아니 자꾸 나 약 올리잖아. 엄마 중국으로 간 거 아니냐느니 아빠 진짜 경찰 맞냐면서......”

나는 설명하다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할머니에겐 말하지 않았다. 딸이 행방불명 되고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나까지 짐이 되고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마음속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할머니의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닌데.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온 외롭고 서운한 감정들이 차고 넘쳐 결국, 터져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기억나? 너 학교 처음 입학한 날 담임선생이 칠판에 자기 이름 써보라고 했는데 소원이 너만 너 이름을 못썼던 거.”

“당연히 기억나지. 나만 못썼잖아.”

“ 그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앞으로 학교생활은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줘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1학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면서 반에서 1,2등 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너무 자랑스러웠지. 그래서 내가 힘이 닿는 데까지는 꼭 학교에 보내려고 했어.”

“미안해......”

“좀 배우지 못하면 어때. 바르게 잘 살면 되지. 대신 책을 많이 읽어. 책은 인생의 길동무나 같아. 아는 게 힘이고.”


초등학교 입학하던 첫날 부모님의 맞벌이로 할머니가 대신 학부모로 왔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 후 할머니는 더 이상 보자기에 책과 필통을 싸주며 학교에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에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은 인생의 길동무와도 같다고. 어쩌면 유치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내가 내 이름 석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내 이름 석자도 못쓰던 내가 글 쓰는 작가가 되리라고. 하늘에 계신 우리 할머니가 이런 나의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내 인생의 영원한 친구이자 스승. 책과 할머니. 지금도 나를 살게하는 말 중 가장 중요한 말.

“아는 게 힘. 책은 인생의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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