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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Aug 27. 2024

13살, 어느 봄날의 기억


텃밭에 뿌린 퇴비 냄새가 산들바람을 타고 퍼지는 계절. 나는 잠시 포도나무 밑에서 단잠을 청했다. 할머니의 밭고랑 만드는 소리는 마치 나를 잠에서 깨라고 하듯 요란스럽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할머니는 허리에 배낭끈을 몇 바퀴나 돌려매고 허리를 잔뜩 굽힌 채 텃밭에서 감자를 심고 있었다. 할머니가 허리에 배낭끈을 돌려매는 습관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시작되었다. 배가 고플 땐 배를 꽉 조여주면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의 말처럼 나도 해봤지만, 나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에 도움이 될 뿐 실제로 배고픔을 덜어주진 못했다. 


새싹이 움트는 싱그러운 봄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찬 계절이지만, 매년 이맘 때쯤이면 우리 집을 포함해 농사를 지어 사는 사람들에겐 가장 힘든 시기였다. 옥수수를 추수하는 가을이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고 겨울까지도 그럭저럭 살만하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싹이 움트는 봄이 되면 저장해 둔 곡식이 모두 떨어지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파종으로 사용할 종자까지도 식량으로 사용하는 집도 많았다. 우리 집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올해는 할머니가 어디서 감자 종자를 얻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잠을 깨기 위해 집 앞 우물에서 시원한 물을 길어 올려 세수를 했다. 지하 십미터 정도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물은 얼음물 못지않게 시원했다. 손이 얼얼할 정도의 냉수에 세수를 하고나니 더위가 싹 가실정도로 시원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 내가 뭐 도와줄까?”

“일어났어? 거의 다 심었어. 종자도 많지 않아서 올해는 반 정도 밖에 못 심겠어.”

“그럼 나머지 밭에는 뭐 심으려고?”


나는 감자 종자를 할머니에게 건네며 물었다.


“알아봐야지, 감자 종자를 더 구하거나 시금치 씨라도 사서 뿌려야지.”


할머니는 마지막 감자 종자를 묻으며 말했다.


“올해는 할아버지의 옥수수 농사가 잘돼야 할텐데...... 아니 사실 그보다 도둑을 맞히지 않아야지.”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텃밭 옥수수를 지키기 위해 경비를 서다가 옥수수를 도둑질하러 온 군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멍이 들어서 온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텃밭은 집에서 좀 떨어진 야산에 꽤 크게 있었다. 봄이면 할아버지는 배낭에 파종할 옥수수와 퇴비를 직접 어깨에 메고 날랐다. 그렇게 힘들게농사지어놔도 경비를 서지 않으면 그 옥수수는 모두 도둑 맞히고 말기에 올해도 그게 가장 적정이었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피멍이 들어 온 후로는 어린 나였지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함께 경비서겠다고 따라나섰다. 솔직히 내가 있다고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깊은 밤 어두운 산속에서 뻐꾸기 소리만 들으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할아버지에게 실없는 말들이긴 해도 나의 조잘거림이 꽤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평소 과묵하신 분이라 표현은 안하셨지만, 할아버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그런 할아버지의 과묵함에 답답하고 화난 적도 많다. 옥수수를 도둑 맞히고 얼굴에 피멍이 잔뜩 들어서 온 날도 할아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흥분한 할머니와 나의 흥분을 잠재우기에 바빴다. 정말 양심없는 사람들이라며 남의 것을 훔쳐 가는 주제에 어떻게 주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냐며 내가 열을 내고 있으니 가만히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걔들도 다 먹고 살려고 그런거야. 어쩌겠어 배가 고픈데 뭐라도 먹어야지.”


이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나와 함께 시장에 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물건을 살 때 조금이라도 흥정을 하면 그대로 주라고 했다. 그래야 그들도 먹고산다고. 정말이지 할아버지는 함께 사는 우리 가족에겐 고구마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 할머니 성격이 더 괴팍해진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13살이 되던 해, 어느 봄날의 기억. 다들 먹고 살려고 그런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은 지금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말들 중 하나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먹고 살려고 애쓰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세상사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70번 이상의 봄을 경험한 할아버지가 이제 겨우 13번의 봄을 맞은 나에게 남긴 말은 지금도 선명하다.


“다들 살려고 그런거야. 어쩌겠어 서로 돕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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