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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Sep 03. 2024

사촌 오빠의 군 입대


“오빠 몸 조심히 잘 다녀와. 편지하고.”

“알겠어. 잘 지내고 있어. 편지할게.”

사촌 오빠는 나를 안아주고 차례로 큰이모와 언니를 안아줬다. 큰이모부는 슬쩍 뒤로 몸을 뺐다. 내가 큰이모 집을 떠나기 전 사촌 오빠가 군입대를 했다. 입대 후 면회를 가지 않으면 10년 동안 만날 수 없었기에 훈련소 앞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큰이모 가족들도 모두 사촌 오빠를 배웅하며 눈물을 흘렸다. 딱 한사람 큰이모부만 빼고. 큰이모부는 말도 없고 감정표현도 잘 안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큰이모 집에서 지내는 동안 큰이모부가 화내는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큰이모부는 가끔 기분이 좋을 때 사람 좋은 소리를 내며 웃을 뿐 평소에 감정표현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큰이모부의 평정심은 사촌오빠가 군입대 하는 날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말 강철 같은 사람이었다. 키도 유난히 크고 체구도 꽤 컸다. 그런 모습에 큰이모가 반한 걸까. 성격이 세고 할 말은 하는 큰이모와 달리 큰이모부는 정말 온순했다. 마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촌 오빠가 군대에 입대한 후에도 나는 몇 달 더 큰이모 집에 머물렀다. 몇 달 동안 전입신고도 없이 큰이모 집에 머물자 점차 동네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궁금해했다. 조카라고는 알고 있지만, 놀러 온 조카가 너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아닌지. 부모는 뭐하는지 등 나에게 직접 묻기도 하고 큰이모 가족들에게 묻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곧 간다며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단순한 그들의 궁금증이 나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가끔은 부모는 무슨 일 하며 학교는 어디 다니다 왔는지 등 집요하게 물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엄마가 행방불명되고 아빠가 선박사고로 돌아갔을 때가 생각났다. 계집애가 팔자 사나워서 부모 다 잡아먹은 거라고. 팔자가 사나워서 쓰겠냐는 등 어린아이가 듣기엔 다소 충격적인 말들을 했던 동네 사람들의 말이 떠올라 힘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던 걸까. 그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라도 있었던가.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어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누군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언행은 하면 안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행히 큰이모 집에서 몇 개월 머물며 조금씩 심적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가끔 악몽을 꿨지만, 적어도 잠에서 깼을 때 성폭행을 당한 할머니 집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늘도 나는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나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몽실이었다. 몽실이는 큰이모 집에서 키우는 새끼 강아지였다. 걱정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닭들을 쫓고 있는 몽실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닭 쫓는 게 뭐가 신나서 저렇게 해맑게 뛰어다니는지 철없이 뛰어노는 몽실이가 부러웠다. 때 되면 주는 밥 먹고 근심 걱정 없이 잠자고. 몽실이에겐 인심 좋은 주인도 있고 마음껏 뛰어놀 공간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겐 부모도 없고 맘 편히 살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여기저기 떠돌며 임시 거처하다가 또 어딘지도 모를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기견과도 같은 삶이었다. 잘살아 보겠다는 다짐 같은 건 사치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폭력으로부터 온전히 생존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삶이었다. 가끔, 아니 꽤 많은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다 나도 모르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이 세상 누구도 나의 고통에 공감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맘 편히 쉴 수 있는 나의 집이 없다는 것,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부모가 없다는 것, 이 세상에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팔과 다리 없이 알몸으로 얼음 위를 걷는 것과도 같다. 당시 나의 상태가 그랬다. 그런 나에게 큰이모 집은 잠시였지만 안전한 곳이었고, 특히 사촌 오빠의 관심과 보살핌은 따뜻한 위로였다.

그런 오빠와 이별한 지도 벌써 10년이 흘쩍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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