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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Sep 02. 2024

생존일기


그 괴물이 나를 처음 성폭행한 날 이후로도 나는 몇 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그 괴물의 희열이 커질수록 나의 고통과 고독은 더 깊어져갔다. 그 상태로 계속 있으면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그 괴물을 피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가 자기를 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괴물은 어느 날 저녁 아주 태연하게 할머니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곤 내가 자기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 무언의 협박이라도 하듯 일부러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실없는 농담을 하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 모습이 소름 끼치고 역겨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괴물과 함께 웃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공범처럼 보였다. 더이상 할머니 집은 나에겐 안전한 곳이 아닌 공포의 장소로 되어버린 이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그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괴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떠나는 것뿐이었다. 홀로 견뎌야 하는 그 두려움과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깊게 파고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없었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 화대(함경북도)에 있는 큰이모 집으로 갔다. 만약 그때 내가 큰이모 집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안된다. 다행히 큰이모와 큰이모 가족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렇게 지난 몇 달 간의 고통스러운 성폭력은 멈췄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은 한국처럼 범죄명들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사촌 오빠라는 괴물에게 성폭력을 당했을 때도 본능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느꼈을 뿐 그 행위가 폭력이고 범죄라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북한에 있을 때는 사상교육에 관한 것만 들었지 일반 범죄들에 대한 정확한 명칭이나 그에 대한 법적 처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어려서 그랬을진 몰라도 적어도 내가 경험한 당시 북한 사회는 그랬다.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분명 법이 있지만 사각지대가 많았고 오로지 세뇌교육과 사상교육 외에는 어떠한 법과 제도에 대해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한국은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범죄명들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고 그에 관한 법적 제도들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돌이켜보면 난 어려서부터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가족과 친척이라는 가면 뒤에 가려진 수많은 폭력 속에서 어린 나의 마음은 깨진 유리 조각에 베이듯 참 많이도 베였다. 일찍이 시작된 아빠의 가정폭력에 이어 중학생 때 사촌 오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오로지 나 스스로가 살아남아야 하고 생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삶이란 태어난 순간부터 긴 생존의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나 지금 같진 않을 거야. 이 순간이 지나면 나에게도 분명 좋은 날이 올거야. 조금만 더 버티자.“

고독과 괴로움이 나를 깊이 파고들 때마다 스스로에게가장 많이 했던 말이자 나를 지금까지 살게 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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