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서는 운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가는 힘’이라고 정의한단다.
생각해 보면 작가를 꿈꿨던 나의 삶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가지 못해 안달복달했던 시간이었다.
예정된 시점에 나는 충무로 영화현장에서 데뷔작이 만들어지고 흐뭇한 작가료를 받으며 누구에게도 당당히 내가 쓴 작품명을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되길 꿈꿨다.
괜찮은 작품이 나온다는 건 철저한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니 다소 길어질 수 있는 시간을 감안하고 인내할 것이며 지치지 않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던 ‘순간’은 좀처럼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꿈꾸고 예정했던 시간이 막연하면 막연해질수록 세상에서 아무것도 존재증명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살고 있는 현실의 시간이 감지되었다. 초라한 기분이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영화현장에서 살았던 시간과 노력은 점점 희미해졌다. 내 뜨거웠던 열정의 시간과 앙상하기만 했던 결과가 함께 멀어지는 것 같았다. 분주한 일상을 살면서도 초조하고 두려웠다. 내 또래 비슷한 사람들이 경력이 생기고 무르익은 노하우가 만들어지며 쓰임과 역할을 갖고 사는 것 같아 부러웠다.
어린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 하는 나의 삶은 이제 다시 영화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를 찾는 이도 없었고 내가 숨겨둔 비장의 시나리오도 없었다. 모두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일마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되면 혼자서 시나리오가 아닌 다른 글들을 써보기도 했다. 희망차게 다짐하고 의욕 넘치게 시도했으며 별로 낯설 것 없는 좌절을 다시금 겪었다. 새로운 도전으로 포장한 그 시간들은 지난날의 실패를 만회하고 보상받기 위한 나만의 분투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조차 나는 지난날의 오류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쓰는 과정의 나가 아닌 성취된 순간의 나를 그리고 희망하면서 말이다.
나는 왜 쓰고 싶은가?
그때의 나는 묻지 않았다. 글을 쓰며 들였던 노력과 여전히 확인하고 싶은 내 글의 효용가치에만 집착하고 조급해할 뿐이었다.
조지오웰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은 목적은 대체로 네 가지 중 하나라고 말한다.
1)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3)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에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욕구와 행위는 시종일관 ‘순전한 이기심’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제 막 한글을 뗀 초등학생이 글짓기 대회에서 상장을 받고 싶고 선생님께도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마음, 딱 거기에만 머물러 있었다. 생활의 경험이 쌓이고 속절없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순전한 이기심과 실패의 기억에만 발목이 잡힌 채 나의 글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내가 이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에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이해로 혹은 오해로 받아들여질 때도 감당할 용기가 있을까?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속에 불필요하게 섞여있는 불순물들은 없을까? 혹시 글의 결과물로 얻어질 공명심 따위가 일차적 이유인 건 아닐까?
묻지 않았다. 물었더라도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은 건지,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한 건지도 따져보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 성취의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서 이탈한 내 모든 시도와 행위는 성취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실패’ 그 자체로만 여기면서 말이다.
나는 왜 실패했는가?
왜 나는 이 실패에 유독 연연하는가?
글을 쓰고자 하는 내 욕구의 시작점도 알지 못했으니 실패라 여기고 괴로워하는 내 감정의 정체도 알지 못한 채 습관적인 허기를 느끼고 방황하기를 반복했다.
내가 내뱉은 말과 끼적이는 문장들이 내가 실체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 함께 또 다른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임에도 나는 내 말과 글을 섬세하게 아끼고 가꾸지 않았다. 원하는 결과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한탄하고 자학 하느라 말이다.
나는 또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지만 나의 실패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 사무엘 베케트
수없이 쓰고 도전하고 실패하면서도 정작 나는 나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지 못했던 셈이다. 뭔가를 끼적이면서도 ‘내가 설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어?’라는 자기 의심과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래서 내 민낯을 마주하기가 더욱 두려웠다. 살림과 육아핑계를 댔지만 어쩌면 마주하기 두려워 번번이 생활의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었을지 모를 일이다.
생각의 전환은 우연한 순간에 일어났다.
봄볕의 자외선이 중년의 내 얼굴을 장면으로 가격하는 눈부신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의례적으로 출신학교와 전공을 말하고 길게 혹은 짧게 했던 일들을 나열하자니 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처럼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중년을 살고 있는 나의 단면이라기엔 내 의지와 무관한 젊은 시절의 우연한 선택들에 불과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했다. 결실을 맺지 못한 기억이 부끄럽고 괴로워 내 소개와 약력에서 손쉽게 삭제해 버린 어떤 시간을 되살려야만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간절하고, 뜨겁고, 성급해서 실수투성이였던 시나리오 작가의 시간을 다시 불러와야 했다.
그런데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만들어진 영화가 없는데 시나리오 작가라고 소개하는 것은 어쩐지 사기를 치는 것 같았다. 내가 가진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었던 시절에 대한 자기 연민도 동시에 버리지 못했다. 빌어먹을 나르시시즘의 잔재였다.
‘실패’한 시나리오 작가.
그러다 이른 결론이었다. 내가 했던 일을 부풀리거나 사기를 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애썼던 나의 시간을 되살리는 가장 적절한 명명이었다. 스스로가 떳떳하고 개운한 마음이 들려고 하던 찰나, 나는 갑자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간단히 실패라고 말하기가 그 시절 그때의 나는 왜이리 어려웠을까?'
그날 이후, 나는 그토록 꽉 쥐었던 내 꿈과 욕망에 대한 악력이 내 안에서 조금씩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악력이 풀리고 나니 더 이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로 완성하곤 했던 나에 대해서도 조금은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드는 열패감과 짜증을 감추고 아이에게 도덕 선생 같은 훈계질을 하는 비겁함의 빈도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생활세계에서 살아가며 해야 할 일과 감사할 일, 그리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나의 살아있는 ‘생활’에서 내가 하는 경험과 생각, 내 주변의 관계, 그들의 목소리에 비로소 나는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난날 나의 ‘실패’를 다정하고 친절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내 뜨거운 시간에 대해 나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뜨겁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것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방황과 좌절의 시간마다 내 인생에는 나를 지켜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를 위로한 영화들이 있었고, 용기를 주는 책의 구절들이 있었고, 나를 솔직하게 대면하게 해주는 나의 하루 속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이미 내 삶을 풍요롭게 오랜 시간 감싸주고 있었다.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완벽하고도 성실하게 임하였노라 자부할 순 없다. 그렇더라도 더 이상 나를 다그치고 자학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저 실패한 나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실패에 다다르느라 달렸던 시간을 내 인생의 일부로 아끼고 품어주고 싶어졌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 청춘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어쩐지 대박난 시나리오 작가가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런 슬픈 예감을 비극적이거나 비참하지 않은 태도로 담담히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퍽 다행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못내 아쉬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실패할 용기
실패를 말할 용기
그래서 자유로워질 용기
타인의 인정과 쓰임으로부터 해방되는 용기
그때의 나는 감히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작가를 꿈꾸거나 혹은 무언가를 간절히 꿈꾸는 분들에게 나의 실패가 조금은 유용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사실, 실패해도 숨 쉬고 잠도 잔다.
실패해도 맛있는 거 잘 찾아 먹는다.
실패해도 웃을 일 많다. 생각보다.
실패와 성취라는 경직된 규정 사이에서도 수많은 순간과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우리 모두는 그 사이의 어디쯤을 오가며 살아가는 것이란 것을 그때의 나는 느끼지 못한 채 비장하기만 했다. 영화의 시작이 누아르나 갱스터 영화로부터 비롯되어서인지 나는 인생의 매 순간 너무 비장했었나 보다.
곧 청년기를 맞이하고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할 나의 아이를 비롯, 세상의 모든 파릇파릇한 인생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바람과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은 채 자기만의 우물에서 오랜 방황을 하지 않길 바란다. 미련했던 나처럼.
나 역시 인생의 모든 시간과 방황, 그리고 실수를 개탄만 하지 말고 때론 넉넉히 웃으며 끌어안을 수 있는 ‘명랑한 실패자’로 남은 생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