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공주와 야쿠자

by 디비딥

보바리 부인에게 불륜이 일상을 탈출하여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출구였다면 나에겐 버려두고 방치해 두었던 작가의 시간을 복구시키는 것이 ‘나의’ 출구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소설과 영화들을 끊임없이 보았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강박적이라 여겨질 만큼.


그런데 수많은 작품을 읽고 보면서도 정작 쓰지는 못했다. 일단 어떤 이야기를 쓸지 잘 구상되지 않았다. 결혼을 한 이상 주부로, 엄마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그런 시간은 내게 특별하지 않은, 그렇고 그런 일상의 영역으로만 보였다. 그러니 상상의 나래를 펼 시간은 부족하고 그런 상태에서 무언가를 쓰다 보면 모방작이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를 꿈꾸면서도 작가의 행위를 지연시키고 있는 나만의 기막힌 합리화이자 비겁한 변명들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엄마로, 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아이가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을 가고, 혹은 잠을 자는 시간이 찾아온다. 특히 우리 딸은 나를 닮아 잠이 많았다. 가끔 오후 늦게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까지 논스톱으로 자버리는 날도 있었다. 아이의 수면패턴은 그때의 나를 위한 최고의 효도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가 ‘효도’를 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고요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보바리 부인처럼 ‘일탈’을 감행했다. 영화와 소설 속 범죄와 음모, 절박한 상황에 놓인 거친 사나이들의 세계가 나의 일탈이 머무는 곳이었다. 결혼 전, 영화사에서 일할 때, 정말 잘 쓰고 싶었지만 못 다했던 바로 그 이야기 속 세상 말이다. 고요의 시간 동안 내가 만난 남자는 주로 마피아, 마약상, 부패 형사, 삼합회, 야쿠자 등 세상의 어두운 곳이라면 어디든 꿈틀거리는 욕망하는 수컷들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딸은 유치원을 다니는 여섯 살이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유행이었고 물론 내 딸도 광팬이 되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딸은 심각한 공주병에 걸려있었다.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신화>>를 보다가 오프 더 숄더 드레스 패션에 눈을 뜨더니 급기야 여성이라면 커튼 원단 같은 치렁치렁한 천쯤은 몸에 둘러야 아름다운 것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미적인식을 갖고 있었다.

딸은 수시로 나에게 공주놀이를 하자고 졸랐다.

공주놀이란 게 이런 거다. 자기가 공주이고 나는 마녀나 악당을 하는 것이다. 공주는 치렁치렁한 보자기 하나를 몸에 두르고 수시로 위기에 빠진다. 마녀나 악당 때문에. 그리고 그때마다 그토록 연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나는 계속 악당으로서 혹은 마녀로서 공주를 괴롭혀야 한다. 느끼하고 야비하고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딸을 위한 놀이는 내겐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공주놀이를 하지 않을 때에도 딸은 수시로 나를 불러댔다.

'안나~~, 안나~~~.'

엘사로 빙의한 것이다.

'또 시작이로다.'

빨래를 널다가, 종량제 비닐에 쓰레기를 꾹꾹 눌러 담다가 나는 또 푸념을 내뱉어야 했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하드보일드 소설들에 깊이 빠져 있었다. 특히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시리즈에 푹 빠져서 책장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아깝기까지 했던 때였다.


<<불야성>>은 홍콩의 영화배우 주성치(周星馳)의 이름을 거꾸로 읽은 일본식 발음(하세 세이슈)을 필명으로 사용하는 작가의 놀라운 데뷔작이었다.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이후 사회에 만연한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짙게 배어있는 신주쿠의 가부키초가 소설의 배경이었다. 그곳의 뒷골목에 기생하는 수컷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편을 먹었다가도 배신을 밥 먹듯 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암흑세계 조직원들의 모략과 암투를 박진감 넘치면서도 비정한 누아르로 완성했다.


불야성의 주인공은 혼혈로 중국계와 일본계가 섞였다. 그래서 그는 어느 세계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태초의 고독을 느끼는 남자다. 이런 남자에게 생(生) 은 멈칫하는 순간 사(死)가 될 외줄 타기와 같은 시간의 연속이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 어떤 가치로 살 것인지와 같은 배부른 생각을 할 겨를 따윈 없다. 악인이건 괴물이건 상관없다. 살기 위해 그는 그의 본능과 감각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생존 그 자체만이 절박한 고독한 남자가 살아가는 도시는 황폐하고도 비정한 세계, 그 자체가 된다.


이런 이야기에 빠져있는 엄마에게 드레스 곱게 두른 뽀얀 공주들의 이야기가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내 머릿속에는 지금 삼합회와 야쿠자가 운명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의식 저편에선 안나를 계속 불러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고단하다.

꿈꾸는 삶과 현실의 괴리가 클수록.

티 나는 외도를 하는 건 아니어도 보바리즘을 앓고 있는 아줌마의 삶은 더욱 고단하다.


생각해 보면 엄마로, 아내로, 아줌마로 살면서도 스물스물 창작의 욕구가 피어오를 때면 나는 일상생활이 버거웠다. 의식은 저 멀리 어떤 상상들에 취해있는데, 아이는 말을 걸거나 사고를 쳐놓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이가 놀이터 바닥에 떨어진 동그란 알갱이, 비비탄을 주워 자신의 콧구멍에 쑤셔 넣는 바람에 상상의 세계를 급히 추스르고 응급실로 달려갔던 적이 있었다. 발을 동동거리며 찾아간 응급실에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레지던트로 보이는 의사 두 명은 압력의 차이를 이용한 이상한 장비를 동원하여 비비탄을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내 속은 함께 타들어갔다. 결국 의사는 커다란 모포로 아이를 둘둘 감싸고는 기다란 쇠꼬챙이를 사용해 콧구멍 깊이 박힌 비비탄을 꺼내주었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맞이한 아이는 극한의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비비탄을 빼고 병원을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른 장난거리를 찾느라 해맑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육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노릇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괴로워하는 내게 남편은 아는 집 아들은 50원짜리 동전을 콧구멍에 넣었다는 일화를 전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우리 아이의 호기심, 엉뚱함이 만든 위기상황을 말하자면 나도 꽤나 할 말이 많은 여자다. 그런데 어쩌랴, 내가 낳은 아이고 어릴 적 체력도 약한 우리 엄마를 같은 이유로 괴롭힌 나의 업보인 것을.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나를 키우고 먹이는데 자신의 모든 자의식을 제쳐두고 열심히 했었다. 하루하루 현재의 시간을 살면서 말이다.


가끔 딸에게 미안해질 때가 있다.

버리지 못한 꿈을 주워 안은 채로 살고 있는 엄마를 둔 아이의 삶은 나름의 애환이 있을 것이다. 딸이 커서 그런 이야기를 고백한다면 그때는 나도 반성하며 아이의 투정을 다 들어줄 예정이다. 미리 이실직고하자면 이렇다.


육아를 하면서 나는 항상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미리 계산해 두었다. 그 시간에 나는 지금 내 머릿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멋지게 써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쌓이면 내게도 다시금 못다 한 한을 풀 수 있는 서광이 비치리라. 갑자기 삶이 희망차다. 기분이 좋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럴 때 무슨 일이 꼭 생긴다. 아이에게, 혹은 양가 부모님에게.

구름에 둥둥 떴던 내 마음은 순식간에 김이 빠지고 나는 다시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된다.

어른이 되는 일이란 게 이런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삶의 무게도 알게 되고 견디고 나아가는 법도 알게 되는 것....... 다 알겠다. 알겠단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언제 또 쓰란 말이냐?

끝없이 불평하고 한탄했다.

부모님들이 내 삶에 변수를 만드는 것은 찍소리도 못하면서 아이가 나의 시간에 사소한 변수를 만들며 스크래치를 낼 때 나는 아이를 괜히 혼내기도 했다.

예상보다 등원이나 등교시간이 늦어질 때, 해야 할 일(그래봤자 숙제나 양치질 등의 몹시 사소한 일들이다)을 예상시간에 마치지 않았을 때, 생각보다 늦게 잠들 때.... 나는 아이를 혼냈다. 말은 올바른 생활습관 따위를 운운하며.


나는 비겁했다. 나의 시간을 갉아먹는 원인을 제공하는 아이에게 더 아이 같은 마음으로 짜증을 내는 것에 불과했으면서 거창한 이유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홀로 다이어리에 ‘작가를 꿈꾸는 어미를 둔 아이의 삶은 고단하다’ 따위의 낙서를 끄적이고 앉았는 것이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 결혼생활과 육아에 비치는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다수의 작품을 쓴 기성작가라면 적어도 아이에게 이런 비겁한 짓은 안 하게 될까?


단풍에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걲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중략)......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로버트 프루스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언제나 가지 않은 길, 아니 내가 가지 못한 길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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