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이러고 살지 나조차 모르겠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결혼을 하게 되었다. 되는 일도 없고 심기는 배배 꼬여 있었던 그때에 말이다. 어른들이 인륜지대사라 일컫는 일들도 생각해 보면 준비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태반일 것이다. 탄생도, 진로도, 혼인도, 죽음도 말이다.
나의 결혼 스토리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혼기를 놓친 남녀의 우연한 소개팅이었고, 매너리즘이 막 오려던 직장인과 경력과 앞날이 꼬여 넋을 잃은 백수의 만남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생계를 위해 열심히 달려오기만 한 남편은 지금껏 일중독자로 살아온 듯했다. 그러다 혼기를 놓쳤고,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을 빼곤 주변이 기혼자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업무는 과중하고 퇴사가 아닌 이상 계속 이런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연애는 언제 하고 결혼은 언제 할지 막연해져 가는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만난 여자가 나였다. 나는 그에게 대충 나를 이렇게 소개했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일을 했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죽을 쑤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은 확 잠수나 타는 게 소원이다.
그때 남편의 속내는 이런 것이었던 것 같다.
'이 여자는 내가 아무리 바쁘고 아근의 연속이어도 잔소리 안 하고 혼자서 잘 놀겠구나.'
그때의 나는 나랑 정반대로 살아온 사람이 내가 하는 일과 하려는 일, 그리고 내 취향의 세계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준다는 게 좀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모두에게 그런 사람이기는 했다.
아무튼 우리는 몇 차례 만나 커피나 맥주를 앞에 두고 대화를 했다. 그 당시의 나는 '되는 일'이 없이 살다 보니 연애고 나발이고 그런 건 모르겠고 저 사람 사는 얘기나 들어보자,라는 마음을 가졌건 것 같다. 그것이 뜻하지 않게 경청의 태도로 이어졌던가 보았다. 남편은 나의 그런 태도가 자신에 대한 호감이라 확신했고 그 확신은 결혼에 대한 추진력으로 이어졌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끔은 싸우고 가끔은 웃으며 특별할 것 없이 살아가고 있다.
판단력이 심각하게 흐릿해진 시점에 하게 된 결혼이었지만 다행히 사기결혼은 아니었다. 철저히 내 입장에선 그렇단 얘기다. 조금은 늦은 결혼이었지만 출산도 무리 없이 했다. 여느 집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는 소소한 말썽들과 크고 작은 근심들을 동반하며 자랐다. 생각해 보면 밑도 끝도 없는 자의식 과잉의 이기적인 인간에게 우연히 떨어진, 평범해서 감사한 선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었다.
아내로, 엄마로 사는 동안에도 나는 어떤 향수와 울분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장소는 영화사 사무실. 영화사 대표의 고성과 욕설에 나도 물러서지 않고 대차게 싸우는 장면이 나의 무의식에서 살벌하게 펼쳐졌다.
보바리즘이란 용어가 있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유래한.
소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엠마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결혼과 사랑에 대한 막연한 공상과 상상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그녀에게 낭만적 사랑과 그것의 완성으로서의 결혼은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그녀는 샤를르 보바리라는 시골의사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와의 결혼생활은 그녀가 추구했던 이상과 맞지 않았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시간의 연속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다른 남자들을 두리번거리고 그들의 요염하고 매력적인 '정부'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렇게 그녀의 낭만적 망상은 끝도 없이 확장된다. 하지만 남자들은 결국 그녀를 배반한다. 그녀가 꿈꾸는 낭만적 사랑이나 영원은 그녀만의 이상이었을 뿐,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잠시 스쳐갈 뿐이다. 그녀에게 남은 건 버림받은 현실과 탕진한 가산, 그리고 더 처참해지고 권태로운 자신의 일상뿐이었다. 낭만과 망상을 쫓던 그녀는 결국 현실과의 괴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한다.
어떤 토양에 고유한 것이어서 그곳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잘 자라지 않는 식물이 있듯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엔가 따로 있을 것 같았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화영 역, <<마담 보바리>>, 민음사, 64쪽
작가 플로베르는 19세기 부르주아 여인의 내면에 잠복한 과도한 이상과 낭만, 허영이 불러온 현실과의 간극을 심리적으로 해부하듯 그려나갔다. 끝끝내 봉합할 수 없었던 그 간극에 대해서 말이다.
엠마의 심리적 상태로부터 유래한 보바리즘에 대한 정의는 대략 이렇다.
과거에 대한 추억, 미래에 대한 꿈이 현재를 지배하는 정신병.
히스테리와 유사한 병이지만, 외적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 점이 다르다. 즉 과거에 대한 추억 때문에 미래가 이상화되어 현재란 끝없는 환멸과 기쁨의 연속이며 현실 도피의 세계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원했던 일에 대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갑작스러운 결혼은 내가 열정적으로 했던 일을 한 번도 제대로 정리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남기고 있었다. 말하자면 화장실에서 잔변감을 남긴 채, 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불청객처럼 내 일상에 불쑥불쑥 찾아드는 것이었다. 이전과 달라진 나의 현실에서조차 말이다.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감정과 지금의 내 현실과의 간극은 '보바리즘' 그 자체였고 나는 그것을 남몰래 앓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영화사 대표님의 진단은 틀릴 것도 없었다. 세상물정 부실, 경험 미숙, 상상력과 돌파력의 부족은 작가를 꿈꾸는 나로선 치명적인 약점이 분명했다. 당시 거기에 왜 ‘젊은 여자애’라는 말을 붙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젊은 여자애도 아닌 지금의 나라면 똑같은 상황이 펼쳐져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물론 대표님의 대사는 조금 바뀔 것이다.
‘작가가 살림만 하는 아줌마다 보니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