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비디오 촬영,
보습학원 강사,
사내 방송국의 대본작가.
부모님 눈치가 보여 뭐라도 해야 했고 그래서 했던 일들이었다. 그 어떤 소속감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동질감도 없이 했을 것이다. 흥분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는 것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낸 채로 말이다. 누가 봐도 밥맛 없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에 좌절하고 생활에 타협해 가는 자.
그것이 스스로 규정한 나의 모습이었다. 혼자 비애에 젖어 섬처럼 떠 있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외로운 인간이라 자처하면서 말이다. 어정쩡한 젊음과 지나친 감상주의는 이렇게 꼴값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자기혐오와 비하는 기본에 누구에게나 공격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시원한 캔 맥주와 오징어 다리, 혹은 소주에 번데기 통조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채우고 감싸주는 기특한 것들이었다. 알싸한 액체와 쫄깃한 덩어리들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한밤중 소싸움대회 중계방송을 보았다.
그때는 공중파 채널만 있던 시기를 지나 새로운 채널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M.net이나 OCN처럼 일찌감치 특화된 콘텐츠들로 자리 잡은 채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채널은 예능프로 재방송이거나 옛날 드라마를 방영하는 등 자체 콘텐츠 부족에 꽤나 허덕이던 초창기 멀티채널의 시대였다.
소싸움대회는 공중파와 인기 케이블 채널을 리모컨으로 한참 넘기고 나서 나오는 ESPN이란 채널에서 방영했던 경기였다. 이 채널은 주로 스포츠 경기나 격투기를 보여주곤 했는데, 12시를 한참 넘긴 새벽시간에는 그마저도 콘텐츠가 딸린 모양이었다.
화면에선 넓게 깔린 모래판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 경기에 출전할 황소들이 들어서면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황소들의 경기전적을 꽤나 진지하게 소개했다. 해설위원은 반가운 얼굴이었다. 내가 꼬마였던 시절 필수 시청 프로그램이었던 ‘뽀뽀뽀’에서 뽀식이 아저씨였던 이용식이었다. 지난날 내 어린 동심과 함께 했던 뽀식이 아저씨는 기가 팍 죽어 찌그러진 채, 청춘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와 다시 함께 하고 있었다.
전설의 챔피언 ‘대왕이’란 황소를 기억한다. 그가 한 경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승부전이었다. 상대 선수는 ‘칠득이’였다.
두 황소의 캐릭터는 완전히 달랐다. 대왕이가 차분하고 공격의 타이밍을 신중하게 기다리며 느린 경기 운영을 하는 편이라면, 칠득이는 눈치가 빠르고 기습공격과 잔기술이 많은 황소였다.
초반에 뿔 치기와 들치기를 현란하게 구사하는 칠득이의 공격을 대왕이는 묵묵히 받아내기만 했다.
역시 심심하고 지루한 경기구나,라고 생각하며 채널을 돌려야겠단 마음을 먹을 때였다. 대왕이는 갑자기 가장 단조로운 기본 기술, 밀치기로 칠득이를 들이박았다. 모았던 힘을 발산하는 그 순간에도 대왕이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자 그렇게 현란한 기술로 대왕이를 집적거리던 칠득이는 갑자기 머리를 돌려 모래판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곧이어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대왕이를 출전시킨 주인아저씨는 모래판 밖에서 저고리 옷고름이 풀어진 줄도 모른 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기쁨에 겨워 한잔 걸치신 티가 역력했다. 대왕이는 그렇게 소싸움대회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차분히 기다리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가장 기본적인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능력. 대왕이의 진중한 눈빛과 자신의 페이스에 맞는 경기운용을 보며 나 역시 칠득이 보다 대왕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취기도 올랐고 지나친 감상에 젖어있을 만한 시간이었던 탓인지 나는 어느새 황소 대왕이의 관계자라도 된 양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하고자 했던 일에 이렇듯 신중하고 인내하며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낼 수 있는 생명체였나, 되도 않는 비교를 하며 자기반성과 애상에 젖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살았다. 누구도 나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실패가 부끄럽고 내가 가진 능력이 초라하고 앞으로의 시간이 한없이 막막하여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니 모두가 잠든 시간 골방에 홀로 앉아 황소들의 풍경과 단조로운 경기를 보며 위안을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불안함과 초조함은 더욱 커졌다. 그 무렵 동생은 결혼을 했고, 신혼생활은 과연 깨가 쏟아지는 것인지 얼굴이 점점 피어났으며 얼마 뒤 임신 소식을 알렸다. 그러더니 동생은 손을 움직이는 일이 태교에 좋다며 난데없이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고 가끔씩 친정에까지 털실 뭉텅이를 가져와 대바늘을 잡고 열심히 손을 놀려댔다.
동생이 가지고 있는 털실 한 덩어리를 달라고 했다. 기본적인 바늘의 움직임도 대충 배웠다. 그리고 나는 미친 열정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 예쁜 목도리가 완성될 기대보다 뜨는 동안 반복적으로 바늘과 실을 돌렸다 빼냈다 하는 과정에 어쩐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을 꾸역꾸역 채우고 있는 잡념과 걱정과 불안이 바늘을 움직이는 동안은 적어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새해가 밝은 그 순간에도 나는 뜨개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주무시던 엄마가 화장실을 가려고 새벽에 깼다가 눈을 부라리고 뜨개질을 하는 내 모습을 보시곤 잠깐의 공포를 느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엉뚱한 일에 집중하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털실을 두 뭉텅이나 썼던, 사연 많은 목도리는 나중에 이렇게 되었다.
동생이 주었던 털실로 완성된 목도리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스스로가 싫고 모든 게 부정적이었던 인간의 불안한 손놀림으로 만들어진 실의 짜임이 매끄럽고 고울 리 있었겠는가.
생각을 비우기 위해 오직 뜨는 과정일 때만 효용가치가 있었던 목도리는 완성이 되자 내 방 귀퉁이에 당연히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파가 지속되던 어느 날 결국 베란다 수도의 동파를 막기 위해 꽁꽁 싸매는데 쓰이고 말았다. 자가 소유의 주택을 아끼는 아버지의 실용적 판단이었다.
한심한 나날들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생일을 맞이했던 아침. 아버지는 아침잠 많은 나를 깨우더니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술을 따라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야, 축하한다. 네 마음대로 해라.”
심각하게 찌그러져 있던 딸에게 한마디 툭 건네곤 아버지는 술을 들이켰다. 어린 시절에는 그럭저럭 기대도 있었고 열심히 키운 보람도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본인이 보시기에도 내 상태가 참 견적이 뽑히지 않는 애물단지라는 생각을 하실 무렵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어떤 복잡한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 말은 아버지에게 받은 그 어떤 것들보다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말해준 아버지에게 두고두고 고마웠다. 그림자 같은 시간을 보내는 인간에게는 부모의 적당한 체념이 어쩌면 가장 필요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