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 40] 내 나이가 어때서

by 디비딥


최승자 시인의 시, <삼십 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시를 발표한 40여 년 전보다 평균수명은 상승했으니 나이가 주는 위기감도 유예되는 것일까?


영화의 주인공은 라다 블랭크다.

그녀는 영화의 주인공인 동시에 감독이기도 하고 각본도 직접 썼다.

그래서 자전적 요소가 농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녀는 이제 곧 사십 세가 된다. 그리고 최승자 시인이 말하는 삼십 세의 정서 비슷한 불안감에 놓여 있다.

그녀가 30대이던 시절, 스스로도 아직 젊다고 자부했던 시절의 그녀는 촉망받는 극작가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렘가의 학교에 수업을 나가고 있다.

그녀의 학생들은 하나같이 삐딱하거나 불량하거나 아니면 또라이들이다.

그녀는 그저 '예술가'가 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비루하기 그지없다.


그녀에겐 한국인 게이 친구, 아치(피터 킴)가 있다.

그는 그녀가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음탕하고 노욕 가득한 백인 투자자에게 조아리며 그녀에게 연극 공연의 기회를 만들어주려 애쓴다.

그야말로 상업예술의 이면, 즉 자본의 논리와 돈줄을 쥔 이들의 음탕한 탐욕과 위선의 현장을 온몸으로 견디고 비루함의 최극단을 참아내는 인물이다.

아치의 입장에선 자신이 이렇게까지 애썼으면 라다도 투자자가 원하는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의 똥고집과 성질머리는 친구인 아치가 워워 시키려 해도 만만치 않다.


라다 역시 자신의 현실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집세도 내야 하고 집 밖을 나서면 허구한 날 동네 어르신들의 훈계질도 참아내야 한다. 그녀의 동네 어르신들이라 하면 거리의 노숙자와 산책을 하는 할머니 등인데 사실 그분들의 직언은 어느 하나 틀린 구석이 없는 촌철살인의 말들이라 웃음을 자아낸다.


한 때의 영광과 미래에 대해 희망으로 가득했던 기억을 뒤로하고

홀로 40대를 앞둔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삶을 랩으로 토해내기 시작한다.


왜 생리가 안 터져? 이거 또 시작이네.
배는 나오고 피는 끊기네...... 종아리는 왜 이렇게 쑤셔?
신경통이 족쇄처럼 다리를 묶네......
방귀인 줄 알고 뀌었는데 아니어서 당황.
요새 힙합 보면 무슨 내가 노인네 같아......
춤 좀 춰보려 해도 다리가 걸려.
그래, 이게 40살 인생이다. (라다의 랩 중에서)


현실에 순응하지 못해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고 적당히 타협할 줄 몰라서 거칠어지는 이 여자.

그녀는 순응과 타협에 능하지 못한 대신 지나치도록 솔직한 용기를 지녔다.

쇠락하는 육체의 징후를 느끼고 세상과 불화하는 자신에 대한 인식.

처음으로 도전해 보는 그녀의 랩에는 그녀만의 이런 용기 있는 고백으로 인해 그녀만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몸은 비대하고 입은 거칠고 제작자 이하 예술관계자들 앞에서 사회적 에티켓도 몹시 떨어지는 이 여자가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고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념의 포기를 요구하는 현실적 상황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탈출구를 만들고 자기답게 스스로의 이야기를 토해낼 줄 아는 용기 말이다.


그녀가 억지로 타협하고 순응하여 완성된 연극의 엔딩은 백인 이웃과 흑인 이웃의 뜬금없는 화합의 포즈를 취하며 마무리된다. 물론 백인 제작자의 취향에 맞춘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인사를 하는 감독과 제작자는 그녀를 무대로 불러들인다. 무대에 오른 그녀는 어색하게 식상하고 뻔한 멘트를 하다가...... 다시 랩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삶에 질식하고 겨우 이런 돈에 신념을 파는데 질렸고
하지만 이젠 다른 선택을 내렸어.
FYOV(Find Your Own Voice)의 시간이야.
네 목소리를 찾아.
거짓말 늘어놓기는 내 천성에 안 맞아.
진정한 모습 숨기기는 그만.
네 비전에 스스로 투자해.
네 공허를 스스로 채워.
네 목소리를 찾는 거야.
늙은 독수리는 좇 까라 해.
40살 버전. 그게 나야. (라다의 랩 중에서)



연극의 대본으로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던져놓고는 무대에 마이크를 툭 던져버리고 내려오는 라다. 그녀는 그렇게 공연장을 떠나버린다.


신념을 버리고 상업예술과 자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성질머리 죽이지 못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가며 살 것인가?

두 가지 선택을 두고 라다는 후자를 선택한 셈이다. FYOV!


그녀에겐 혹독한 대가가 따를 것이다. 여전히 집세를 고민해야 할 것이고 이리저리 방황도 해야 할 것이다. 풍요를 보장할 수 없는 미래와 고립된 삶에 꽤나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강력한 무기가 보인다.

거침없는 솔직함으로 자기 고백을 할 줄 아는 용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녀의 무기가 많이 부러웠다.

영화 속 이름이자 실명이기도 한 라다 블랭크. 난 이미 그녀의 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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