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남자, 윌리엄스.
그는 영국 시청의 공공복지과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같은 시간, 같은 복장으로 그는 수십 년간 같은 직장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공무원이란 이름의 다른 동료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말이다.
어느 날 그는 병원에서 시한부 진단을 받는다. 의사는 앞으로 6개월이 남았다고 말한다.
생각지 못했던 삶의 커다란 변수.
늘 같았던 그의 일상은 맥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다음날, 그는 결근을 한다. 물론 결근계를 내지 않았다.
그의 커리어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일탈의 행동에 동료들은 의아하다.
그는 그 시간에 해변의 어느 카페에 홀로 앉았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예술가(극작가)에게 말을 걸고 가까운 이들에겐 하지 못했던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이야기한다.
의사 말이 6개월 남았다더군요.
우습군요. 당신한테 처음 하는 얘기예요.
내키는 대로 현금을 챙겨 와 난생처음 즐겨보려 했던 윌리엄스는 정작 어떻게 즐겨야 할지 방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예술가를 따라다니며 향락의 시간을 보내보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 놀 줄 몰랐던 남자가 맞이한 갑작스러운 해방과 향락의 밤은 그에게 맞는 옷은 아닌지 공허함만 밀려올 뿐이다.
그날 밤 잃어버린 중절모를 사느라 거리를 헤매던 중 그는 자신의 밑에서 일하던 여직원, 해리스를 만난다.
그녀는 시청근무가 무료하고 따분하여 그곳의 근무를 관두고 새로운 일을 하려는 중이다. 그의 추천서가 절실히 필요하던 차였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직장 상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죽음을 앞둔 중년 남자의 복잡한 심상을 알 리 없는 그녀는 특유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전 직장 상사를 반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목적을 잃어 시간이 널브러진 남자와 추천서가 필요한 여자는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함께 게임을 즐기며 대낮의 거리를 활보한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젊은 활기는 그가 오랜 시간 감각하지 못한 채 흘려보냈던 생의 열기를 돌아보게 한다.
하루라도 저렇게 활기차게 살 수 있다면...
아마도 당신처럼 사는 법을 배우고 싶었나 봐요.
귀가 길에 멈춰서 애는 노는 걸 본 적 있어요? 거리나 공터에서요.
때가 돼서 엄마들이 집에 오라고 부르면 보통 마지못해 가거나 방황하죠.
애들은 그래야죠. 그렇지 않은 애들보다 훨씬 나아요.
다른 애들과 못 어울리고 구석에 홀로 앉아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애들.
엄마가 부르기만 기다리는 애들.
그런 애처럼 생이 끝날까 두려워졌어요.
죽음을 선고받고 나니 살아왔던 지난날이 허무하고 두려워진 남자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며칠간의 무단결근을 끝내고 시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에게 남아있었던 '어떤 일' 하나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한다.
웨이클링 : 그 여성분들 청원 건이요.
환경 미화과 하비씨가 우리 업무라고 하셔서요.
윌리엄스 : 하비씨가 잘못 알았네요. 하지만 여기 두죠. 해 될 거 없으니.
그가 최초로 무단결근을 하기 전, 혹은 암을 선고받기 전, 그는 민원서류 하나를 자신의 자리에 끼워두었다.
몇 명의 여성들이 요구한 아이들 놀이터 건립에 대한 청원 건이었다. 그저 아이들이 편하게 놀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엄마들의 소박한 요구였다.
하지만 그 '대단한 업무'는 절차와 관할 소관을 이유로 시청의 여러 부서를 돌고 도는 중이었다.
먼지 쌓인 서류를 꺼내 들고 그가 했던 마지막의 행적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생을 마친다.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그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가 놀이터 건립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했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때로는 열정적이었고 때로는 상관에게 비굴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놀이터를 완성하고 싶어 했던 그의 뜨거웠던 며칠에 대해서.
결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진짜 삶을 산 이야기.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 작품 <<이키루>>를 원작으로 한다.
관료제에 찌들어 무기력하게 살던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진짜 생의 에너지를 각성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일본이 아닌 영국의 산업사회에서 중절모와 양복을 입은 중년남 윌리엄스의 이야기로 재탄생되었다.
하지만 원작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영화의 시작과 끝에 시청의 신입사원인 웨이클링을 배치하여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는 점이다.
신입사원의 눈으로 바라본 윌리엄스는 기차의 같은 칸을 탈 수 없을 만큼 관록 있는 상관이다. 그런 그가 무단결근을 할 때는 그동안 쌓인 이미지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의문의 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직사회의 부품과도 같은 삶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창조적 열기를 내뿜었던 멋진 인생선배가 된다.
웨이클링 씨.
다소 개인적인 얘기를 해도 될까요?
우리의 놀이터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분명 말하건대 그것 역시도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른 사소한 것들과 같은 전철을 밟겠죠.
황폐해지거나 거창한 계획 때문에 사라질 수도 있겠죠.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가 만든 것이 영구적인 기념물은 아니에요.
어떤 목표를 위해 매일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온다면
무엇보다 일상에 지쳐 오랜 시간 내 발목을 잡았던 그런 상태가 되어
당신도 움츠러든다면 우리의 작은 놀이터가 완성된 순간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 보길 바랍니다.
까마득한 후배인 웨이클링에게 그가 진짜로 인수인계하고 싶었던 것은 거대한 구조 속에 결코 '좀비'로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때 자신의 별명처럼.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관료제를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정의한다. 업무를 세분화하여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근대사회의 합리화 과정을 보여주는 조직형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특정 '기능'에 치중한 조직이 개인의 개성이나 소망에 귀 기울일 수는 없다. 그리하여 '기능'하는 자로서의 개인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업무와 책임을 최소화하여 감수해야 할 위험을 줄이며 '오늘도 무사히'를 바라는 삶으로 안착해 간다. 효율과 생산의 부품으로 전락한 근대적 인간의 쓸쓸한 초상이었다.
영화는 말한다.
그것은 살아 있어도 산 적이 없는 것이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때우는 것이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도 하는 일이 없는 것이라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생의 열기를 갈망하는 윌리엄스의 그 짧은 시간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윌리엄스가 다시금 느끼고 싶었던 생의 열기는 무엇이었을까?
놀이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것. 그리하여 즉흥적이고 창조적인 순간을 몸소 느끼는 것은 아니었을까.
놀이터건립을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그 일의 성사를 위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조차 감수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순간은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남겼다.
영화를 보다가 이 그림을 떠올렸다.
르네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1964).
처음엔 복장의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뻔한 의상을 입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도 누군가의 아들이긴 한가 본데 이 남자의 구체성은 정작 파란 사과 뒤로 감춰져 있다.
윌리엄스가 떠난 후, 시청 직원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그의 행적들로 그의 진짜 의도를 조합하고 추리했다.
그림 속 파란 사과 뒤편에 놓인 사람의 얼굴과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그 사람의 고유성을 상상하고 싶은 감상자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어쩌면 윌리엄스를 애도하는 방법은 사과 뒤편에 있는 그의 진짜 모습을,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해 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가 보낸 생의 순간들 속에 구체적 기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윌리엄스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받은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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