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병을 둘러싼 풍경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질병’을 둘러싼 익숙한 풍경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암’은 불치병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암’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보았던 장면들을 나열해 보면 이렇다.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암을 선고받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자신들이 붙잡을 한 가닥 희망이 가까워질 것도 같아 더욱 허리띠 졸라매고 있는 중이다.
이런 때 하필이면 암에 걸렸단다!
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절규한다.
‘왜 하필 나’여야 하냐고, ‘이건 공평하지 않다’고.
이제 암을 선고받은 자는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진다. 그도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증상(암)을 숨긴 채 태연하게 살려고 애쓴다.
그들에게 암은 ‘사형선고’다. 그들은 졸지에 삶의 패배자가 되었으며 의기소침하고 우울하며 익숙하게 살아왔던 세상은 온통 낯설기만 하다. 마치 자신에게 신의 형벌이 떨어져 대역 죄인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그들의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스스로 희생의 길을 자청하고 감내하려 한다. 표정은 하나같이 슬프고 비장하며 심지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자기 착해지기도 한다.
병에 걸린 자는 절대 약자가 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삶에 대한 애착을 더 갖는다. 하지만 죽음은 가까워진다. 암에 걸린 자가 사는 이야기 속 세계에서 그들의 회생 같은 건 바랄 수 없다.
이야기는 암에 걸린 자를 결국 죽인다.
남은 자들은 그들이 죽어가며 남긴 선물이나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에 감동하고 슬퍼하며 떠난 자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친다.
이야기 속에서 ‘암’은 지나치게 상투적인 방식의 극적장치로 활용되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안일한 방식으로 말이다.
미국의 예술비평가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에 덧칠한 환상과 온갖 이미지들이 사회적 ‘은유’로 활용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150여 년 동안 결핵은 연약함, 감수성, 슬픔, 무력함을 나타내는 은유였다. 반면에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타인의 희생을 가져오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암에 비유됐다. (p. 93)
아버지를 결핵으로 여의고 자신도 유방암을 앓았던 저자는 ‘질병’ 그 자체를 가려버리는 과도한 ‘은유’에 물들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50/50>>은 신선하고 건강한 영화다.
#. 아파도 산다.
주인공은 애덤(조셉 고든 래빗).
아침엔 조깅을 하고 사람이 없어도 교통 신호를 준수하는 평범한 남자다.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여자 친구에게 그녀의 소지품을 보관할 서랍을 따로 마련해 주는 다정한 남자이기도 하다.
어느 날 등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는데, 그는 의사에게 악성종양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슈와노마너로파이브로사코마(Neurofibrosarcoma Schwahnoma).
저한테요? 전 술, 담배도 안 하는데... 아시잖아요.
당황한 애덤에게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희귀암이라고.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병원에서 제공하는 심리치료를 권한다. 그는 충격이 커서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병원에 있는 그 순간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현실감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그는 이름도 생소한, 자신이 걸린 질병에 대해 검색을 한다. 그리고 생존율 50%인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다른 지점은 이제부터다.
애덤은 머리를 쥐어뜯고 오열하지 않는다. 왜 내게 이런 형벌이 내려졌냐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여자 친구 레이첼에게, 부모님에게, 절친 카일에게 사실을 알려준다.
카일의 주도로 회사 동료들에게 알리는 조촐한 송별회를 했고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녀야 하는 새로운 일정이 생겼지만 그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를 둘러싼 일상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림 전시회 준비에 바쁜 레이첼도,
여자를 잘 꼬시는 게 삶의 목표인 카일의 끝없는 수다도,
애덤이 아프기 전에도,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이다.
오히려 카일은 애덤이 암환자라는 것을 이용해 여자를 효과적으로 꼬셔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를 이 녀석은 여자를 꼬시던 중에 레이첼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고 투병하는 친구에게 굳이 일러바치기까지 한다.
절망과 비탄과 오열이 생략된 투병인은 가끔은 연인과 친구 때문에 피곤하고 가끔은 통증에 괴로우며 가끔은 두려운 채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애덤에게 병원은 새로운 일상의 공간이 되었다.
화학치료를 함께 받는 할아버지들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고,
초짜여서 모든 게 어설프기만 한 심리상담사, 케이티와는 상담의 매뉴얼을 벗어난 대화를 통해 어느새 진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애덤) 헤어졌거든요. 바람피우는 걸 발견해서.
(케이티) 애덤. 혹시 그것에 관해 대화가 필요하신가요?
(애덤) 아뇨. 전혀 필요 없어요. 차에서까지 상담하진 말죠.
(케이티)....... 최근 저도 헤어졌어요......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해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저에게 좋지 않아요. 제 모든 문제를 알게 되시면 환자와 의사관계를 망가트릴 수 있어요. 솔직히 저는 매일 그 사람 페이스북을 들어가서 누구랑 새로 사귀나 보는데, 참 한심하긴 하죠.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만해야겠네요.
애덤은 케이티가 너무도 허술해서 상담 매뉴얼에 벗어난 실수를 하는 순간, 친밀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럴 때 위로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애덤에게 그가 환자라는 낙인과 그래서 위로받아야 한다는 시선은 너무 뻔해서 재미없고 위선적이며 고루하기 때문이다.
#. 상투적 위로와 시선 너머
(케이티)애덤. 지금은 ‘소외감의 단계’를 겪고 있는 거예요. 정말 아무 희망이 없는 것만 같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느끼는 것들이 이런 경우에 아주 정상적이란 거예요.
(애덤)미안하지만 이 말을 해야겠네요. 그건 다 헛소리야. 처음부터 다들 내게 한 말이 그거예요. ‘좋아질 거야’나 ‘걱정 마’나 ‘괜찮아’. 하지만 사실이 안 그렇잖아요? 난 왜 다들 이 말을 겁내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 그냥 ‘넌 죽을 거야.’ 아무도 그 말을 안 한다는 게 날 더 힘들게 해.
애덤은 치료를 함께 받았던 할아버지(미치)가 사망하자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에 힘들어한다. 그리고 케이티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그녀는 다수의 임상사례를 근거로 한 표준화된 위로를 건넨다.
힘들 때 겪는 감정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맞는 상황에 따른 감정의 보편성.
그것은 때로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증상(희귀암)을 받아들이고 투병을 담담히 감내했던 애덤에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암’에 걸린 사람을 대하는 세상의 ‘상투성’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라 믿었던 케이티 역시 뻔한 위로로 응수하자 그는 참고 있던 울분을 솔직하게 토해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친구 ‘카일’의 존재는 신선하다.
50대 50이라고? 카지노에서는 최고의 확률이야.
자신의 병과 생존확률을 말하는 친구 앞에서 카일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걱정 말라고 큰소리친다. 그리고는 애덤과 함께 있을 때 늘 했던 대로 행동한다. 술을 마시고, 여자 꼬실 궁리를 하고, 애덤이 만난 여자들을 흉보면서 말이다.
애덤은 그 때문에 귀찮고 시끄럽고 피곤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술 취한 카일을 데려다 놓기 위해 들른 그의 집에서 그는 책 한 권을 발견한다.
<<Facing Cancer Together>>
몇몇 페이지는 접어놓고 곳곳에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들.
카일이 투병하는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던 흔적들로 가득하다.
마냥 철없이 보였던 친구, 카일은 어쩌면 애덤이 그토록 싫어했던 상투적 위로를 벗어나 그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주고자 하는 속 깊은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실제 암을 겪었던 작가(윌 레이저)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여러모로 질병을 둘러싼 상투적 은유를 넘어서 살아있는 디테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신선하다. 그리고 건강하다.
상투성을 벗겨내고 신선한 이야기로 마음을 울리는 힘은 결국 진솔하고도 살아있는 디테일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50대 50.
그것은 희귀병의 절망적 생존율이기보다 삶과 죽음의 당연한 지분율인 것도 같다.
질병(특히 암)에 대한 과도한 은유, 상투적 극적 장치들은 지금까지 많이 쓰였고 그래서 지겹다. 또한 그것은 실제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질병을 둘러싼 지나친 두려움과 과도한 의미부여는 극의 핍진성도, 신선함도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을 한편의 영화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