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내가 '겪은' 사랑의 모든 것

by 디비딥

혼돈의 시대, 무거운 분위기가 답답하여 오랜만에 내 기억 속 유쾌하고 달콤한 영화를 떠올렸다.

가장 보통의 남자가 경험했던 500일간의 백일몽.

시간이 지나도 <<500일의 썸머>>는 그 가치가 발하지 않는 멋진 로맨틱 영화다.


#01. 나는 빠져든다. 하지만...



그 일은 하찮은 일이나(그것은 언제나 하찮은 것이다), 내 모든 언어를 끌어당긴다. 나는 그 일이 운명과도 흡사한 그 무엇으로 생각되어 이내 중요한 사건으로 변형시킨다.(p.113)

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사랑의 단상>> 중에서


카드문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남자, 톰(조셉 고든 레빗).

존재도, 그가 겪는 날들도 너무 평범하여 무료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나 그렇듯 눈꺼풀 반쯤 내려앉아 있던 어느 날, 그는 사장의 비서로 들어온 썸머(주이 디샤넬)을 만난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그가 듣던 노래(스미스의 노래)에 그녀가 아는 척을 하며 그들 사이에 친밀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잘 모르겠어. 한 가지는 확실해. 사랑에 빠졌어.
아름다운 미소, 긴 머리칼, 귀여운 무릎,
목에 잇는 하트 모양 점, 섹시하게 입술을 핥는 모습까지.
귀여운 웃음소리, 침대에 잠든 모습도 사랑스러워.
그녀를 생각하면서 듣는 노래도.
그녀가 주는 모든 느낌.
뭐든 할 수 있는 것만 같고
한마디로.... 세상사는 맛이 나요.
by 톰 (썸머와의 만남 151일째)


톰은 썸머를 알게 된 순간부터 운명이라 느낄 만큼 대책 없이 빠져든다. 그에게 그녀의 사소한 몸짓과 반응은 자신의 세계를 결정짓는 운명, 그 자체가 된다.

상대의 감정보다 더 벅차오르는 감정, 환희, 그래서 들뜨는 마음과 환상은 톰을 한없는 기쁨의 양과 동일하게 절망으로도 이끈다.


그녀를 증오해.
울퉁불퉁한 치아, 촌스러운 머리, 튀어나온 무릎, 징그러운 바퀴벌레 같은 점.
더럽게 입술을 핥아대고 천박한 웃음도 싫어.
이 노래도 싫어.
by 톰(썸머와의 만남 322일째)


동일한 대상을 두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과 언어들.

영화는 다른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처럼 젊은 남녀의 해피엔딩을 그릴 생각이 없음을 처음부터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닌 썸머의 이별통보 장면이다.

영화는 두 사람(특히 톰)에게 사랑이 다가오는 환희와 사랑이 시들어가는 절망의 순간을 나란히 배치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 지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같은 여자를 두고 남자가 말하는 151일째의 말과 322일째의 말 사이의 간극. 동일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찬사와 비난은 ‘사랑’이 지닌 얄궂은 가변성 말고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02. 나는 안착하고 싶다. 하지만...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p. 74)


내 삶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사랑의 실패는 흡사하다. X... 그리고 Y... 내 ‘요구’에 응답할 줄 몰랐고(응답할 수도, 응답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내 ‘진실’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시스템을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p. 164)


사랑은, 혹은 연애는 더 간절하게 몰두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빼앗기고 마는 이상한 게임이다. 그리하여 몰두한 자는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기를, 나만큼 간절해지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만다.


누구 여자 친구 되는 건 불편해요. 누군가에게 구속되는 거 싫거든요......
사랑 같은 건 없어요. 환상이죠.
by 썸머(톰과의 만남 28일째)


썸머는 호감을 가진 이성 간에 관계가 규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부모가 이혼하는 것을 본 그녀는 사랑이 퇴색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순간적 호감에 연애는 할 수 있지만 사랑하기는 싫다.

이런 그녀를 사랑해 버리게 된 톰은 썸머가 자신을 사랑하고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사랑’이 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냐! 나 갖고 놀 생각 마. 더는 안 돼! 이런 게 친구 사이야?
복사실에서 키스하고 손잡고 쇼핑하고 샤워하면서 섹스하고?
말도 안 돼!
...... 내 의견도 들어봐야 하잖아! 우리 애인 사이 맞거든.
by 톰(썸머와의 만남 259일째)


기다림에 지친 톰은 우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것을 썸머가 인정하고 그들이 ‘애인’이라는 선언을 하길 바란다. 하지만 한쪽의 바람이 커질수록 두 사람이 함께했던 행복의 강도는 약해지고 서로 바라는 것의 간극만 키울 뿐이다. 호기심 가득했던 상대가 점차 익숙해지며 흘러가는 시간은 그들의 사이를 무료하고 시들하게 만들어 버린다.



#03. 나는 미끄러진다. 하지만...


말이란 가장 격렬한 변질을 일으키는 미세한 화학물질이다.(p. 56)
어떤 정확한 힘이 내 언어를 재앙으로 몰고 가 나 스스로를 해치려 한다. 나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고, 천국으로부터 추방하려 한다.(p. 129)


톰의 직업은 여러 카드에 인쇄되어 있는 멋진 멘트를 쓰는 일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일이 원래의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꿈이었던 건축사가 되는 길은 요원해 보였고 돈은 벌어야 했으므로 현실과 타협했다.

썸머에게 호감을 가진 순간,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꿈이 건축사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와 보내는 시간에 그는 자신이 꿈꾸는 건축설계를 그녀의 팔에 직접 그려 보이기도 한다.

카드 문구를 쓰는 톰이 아닌 ‘꿈’을 가진 톰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는 그녀에게 자신을 좀 더 근사하게 보이려는 과시욕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하는 일과 꿈꾸는 세계의 거리는 어쩌면 톰이 생각했던 사랑과 그것의 실체 간의 거리와 닮아있다.

그는 사랑에 빠진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이미지 속에 던져놓는다.

썸머와의 멋진 밤을 보낸 다음 날, 출근길에 나선 톰은 뮤지컬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간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응원하듯 반겨주고 심지어 차창으로 비친 해리슨 포드(<<인디아나 존스>>에 나왔던 그 모습, 모험이 대가이자 성공의 화신으로 말이다)는 그에게 윙크를 건넨다.


우리가 막연히 사랑을 생각할 때, 세상에 뿌려진 수많은 사랑의 이미지들에 의탁하는 것처럼 톰도 그러하다.

이는 썸머와의 사랑이 끝났다고 절망한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이때 톰은 무성영화의 주인공이 된다(이런 장면에서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비>>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의 장면이 패러디된다). 영화의 내용이나 주제와 무관한 고전영화들이 차용되며 비극에 빠진 톰을 보여주는 방식은 어쩌면 사랑에 숙맥인 톰이 가졌던 사랑의 판타지가 그가 소비했던 실체 없는 이미지들에 의존해왔음을 희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톰은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처절한 경험이 자신의 온몸에 생생히 박혀서 괴로운 톰은 느닷없이 회사 회의 중 이렇게 외치고 만다.



우리는 거짓말쟁이예요.
카드를 사는 건 표현을 못해서가 아니라 카드로 대신 전하려는 거죠.
말하기 두려우니까 우리가 그걸 대신하죠.
온갖 카드와 영화 노래가사에 나오는 얘기들....
모두가 거짓말투성이예요.
우리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린 나쁜 짓을 하고 있어요.
자신의 감정은 직접 말해야 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대신 지껄이면 안 되죠.
그럼, 사랑 같은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만둘게요. 저 없어도 세상엔 거짓이 넘치니까.
by 톰(썸머와의 만남 442일째)


자신의 판타지에 대한 배신감.

그래서 도드라져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운 말들이 갖는 위선.

막연히 알았던 사랑의 외피들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온갖 상상들을 덧붙였던 톰의 몸부림은 썸머를 사랑하고 이별한 자신의 실질적 경험들에 의해 부서진다.





톰 : 운명이니 반쪽이니 진정한 사랑 같은 거. 동화 속에나 나오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썸머 : 아냐. 그게 말이지... 사실은 내가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책 내용을 물었어. 그 이가 내 남편이야.
톰 : 그렇구나. 그래서?
썸머 :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다른 식당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분만 늦게 식당에 갔다면?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그때 생각했지. 네 말이 옳았구나. 단지 네가 너의 반쪽이 아니었던 거야.
by 톰 & 썸머 (만남 488일째)


톰은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그녀와의 사랑에 안착하고 싶었지만 결과는 미끄러졌다.

우연을 필연으로, 환상을 현실로 붙들고자 했던 톰의 분투는 썸머가 그린 세상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이 계속되는 이유.


내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에 그대로 닿을 수 없다는 것,

가장 간절한 소망도 얄밉게 배신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괴로웠음에도 결국은 회복된다는 것,

그렇게 성장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우연이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톰은 알게 되었다. 그토록 징글징글했던 '사랑'을 통해서 말이다.




글을 쓰는 중에 새벽에 법원을 습격한 사람들의 뉴스를 접했다.

소화기를 들고, 경찰의 방패를 빼앗아 들고, 정수기 물통을 든 그들은 놀랍게도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맹목적 신념과 물불가리지 않는 폭발력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참담했고 서글펐다.

그들의 혈기가 누군가의 도구로 오용되지 않기를,

그들의 시간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경험을 위해 쓰이기를,

그들의 분노가 때로는 사랑의 시간으로 녹아내리기를...


지금은 한참 가당찮을 소망을 가져본다.


롤랑바르뜨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들의 젊음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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