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간, 반나절 시간 동안 남녀가 벌이는 싸움.
그들은 연인이다.
서로를 잘 안다.
겪을 만큼 충분히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의 문제점과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음이 뒤틀린 김에 그들은 자신들이 간파한 상대에 대해 비난하고 할퀴고 상처 입힐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작정하고 쏟아붓는다.
그들이 두 시간 동안 방출하는 대화의 주제는 물론 상대에 대한 비난과 공격. 거의 속사포 랩의 수준이다.
맬컴(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영화감독이다. 시사회의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특히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터라 한껏 들떠 있다.
그런데 시사회에 함께 갔다가 돌아온 연인, 마리(젠데이아 콜먼)의 반응이 심드렁하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 삐딱하고 냉소적인 시선이 오늘밤 흥을 깨고 있다.
이 여자 왜 이러는 걸까?
맬컴 : 왜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계속 곱씹으며 엉망으로 만들어서 축하할 이유를 없애는 거야?...... 왜 화났어?
마리 : 나한테 고맙단 말 빠뜨렸잖아. 그게 사소한 일이야? 우리 관계뿐 아니라 당신 일에 대한 내 기여도를 하찮게 여기지. 더군다가 내 얘기로 만든 영화면서.
사실 맬컴은 시사회장에서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늘어놓았으면서 정작 자신의 연인에게 감사의 멘트를 빼놓았다.
맬컴이 만든 영화는 마약에 중독된 20대 여자의 이야기.
연인이었던 마리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마리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이 작품이 되었음에도 마리는 맬컴의 가장 영광된 순간에 생략된 존재가 되어버린 상황. 그럼에도 맬컴은 단순한 실수일 뿐이라고 참으로 간단히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뜨거운 찬사에 도취되어 있으니....
마리는 그것이 역겨워 미칠 지경이다.
맬컴 : 당신 연기 포기한 거 아까워...... 당신 다울 수 있는 캐릭터를 찾으면 끝내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럭저럭 화해를 하려 할 무렵 맬컴이 무심히 건넨 말은 다시 마리의 콤플렉스를 건드린다.
마리는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절박하게 매달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니 곁에 있는 연인조차 그녀가 연기를 포기한 줄 안다.
그리고 오늘 밤 그녀는 자신이 모델이라고 생각한 영화의 주인공을 다른 배우가 연기한 걸 보았다.
뒤틀리는 속을 눌러 앉히려는데 맬컴이 굳이 들추고 만 셈이다.
마리 : 당신은 내가 사귄 남자 중에 가장 결핍이 심해.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장 질투심이 없지...... 당신은 자기 일밖에 모르면서 내가 연기를 포기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
마리는 다시 2라운드를 시작한다.
맬컴의 자신에 대한 안일한 이해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비판하며.
맬컴 : 괴로움, 실망, 꿈은 세상 누구나 갖고 있어. 원하는 배역을 못 따서 화났겠지. '골목의 마른 여자'나 '걱정하는 간호사 2' 역할이 창피할 거야. 근데 첫 출발지가 뿌듯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처럼 재능이 없어도 자존심만 안 세우면 발전할 수 있거든. 자랑스러운 일만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맬컴은 마리의 게으른 재능과 나이브한 인식에 대한 비판으로 응수한다.
두 사람이 사귀고 사랑하고 함께 했던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서로의 가장 아픈 치부를 들킨 시간으로만 활용되고 만다.
마리 : 당신한테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어. 흉내만 낼뿐이지. 망할 앵무새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다른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떠올리질 못해. 뭘 쓸 거지? 맬컴? 당신 얘기? 웃기시네. 당신은 배짱도 없고 진지함도 없어. 자아성찰도 안 하고 흠이나 결점도 무시해서 스파이크 리나 배리 젱킨스와의 차이를 외면해. 그 인간들은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있거든. 자신에게 충실한 자기만의 경험 말이야.
열받은 김에 던지는 마리의 2차 공격.
결국 영화감독으로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모욕을 건넨다.
너는 너의 세계가 없다란 말로.
맬컴은 다시 응수한다. 오직 너의 경험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강조하며.
그녀를 만나기 전, 자신이 경험했던 현란했던 사생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까발린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하는 고백 아닌 고백.
맬컴 : 방금 뭘 깨달았는지 알아? 문제는 당신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야. 겁 많고 이기적이라서 날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거야...... 당신은 통제하려고 해.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함께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하거든. 난 그냥 당신을 사랑해. 필요한 게 아니라고. 그래도 사랑해. 세상엔 당신을 그냥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당신의 사고방식이 좋아.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도 좋고 생각하는 방식도 좋아. 당신의 본능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 당신이 겪었던 모든 것들 덕분에 당신이 완성됐으니까.
개인적으로 어떤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의 대사보다 달달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연인의 모든 뇌구조와 삶의 경험을 끌어안겠다는 이 각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각오는 각자의 민낯을 까고 들키고 공격하고 할퀴는 속에서 피어오른다니... 아이러니다.
그러니 세상에 달콤한 사랑은 오직 드라마에서만 존재한다.
마리 : 왜 날 캐스팅 안 했어? 처음 대본 썼을 때 날 위해 썼잖아. 근데 왜 캐스팅 안 했어?
오늘 밤 느낀 마리의 허탈함과 초라함의 실체.
그녀 자신이 연기자이고 자신의 실제경험이 영화의 출발이 되었음에도 연기할 수 없었던 현실.
더군다가 자신의 연인이 감독임에도 말이다.
마리는 다시 자신의 깊은 본심을 꺼내며 새로운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맬컴 : 연기 포기했잖아. 영화 투자를 받을 때 내가 오디션 보랬는데 당신은 알겠다면서 망설였지. 재능은 있지만 그걸론 부족했어. 그 배역을 따내야 했지...... 노력도 안 했잖아. 그게 잔인한 현실이야.
맬컴은 연인의 게으른 꿈까지 책임져 줄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게 말한다.
자의식 과잉에 다른 사람의 치부는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이 남녀의 싸움은 도대체 끝이 나지 않는다.
마리 : 당신이 질투심 없는 건 그 미스터리를 무시해서지? 하찮게 여기잖아. 세상에 당신보다 흥미로운 인간이 존재하는 건 상상할 수 없으니까. 당신의 호기심 결핍은 자아도취와 과대망상증 독선적인 시각의 연장선이야.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더 나은 연인이 되려고 고민하지도 않아. 괜찮아. 당신은 문제없겠지.
연인이자 감독의 작품 속에 드러난 적나라한 묘사는 결국 빈약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하는 마리.
그런 태도가 그들의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을, 그래서 함께 한 연인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진정성 있는 감사를 표할 줄 모르는 맬컴의 오만함을 마리는 다시 한번 공격한다.
그리고 그들은 새벽을 맞이한다.
누군가를 잘 안다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혹은 내가 잘 알고 있다는 믿는 사실을 상대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까발려 주는 것이 사랑일까?
민낯과 치부를 까발릴 수 있을 만큼 상대를 알아갔던 것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까?
지칠 줄 모르고 속사포 배틀로 밤새 싸우는 혈기왕성한 커플의 이야기를 보며 드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마리는 이 말이 듣고 싶었을 거다.
'나의 작품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고. 그러니 너는 내 삶에 너무나 중요한 존재라고.'
맬컴이 마리에게 듣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훌륭한 감독이고 그건 가까이서 본 내가 보장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난 그런 너의 곁에 항상 함께 할 거라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선빵으로 날린 뒤 건네는 소소한 지적과 충고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적어도 맬컴과 마리가 싸우느라 날밤을 꼬박 새우는 일은 없었을까?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싸움의 기술이 무엇일지 문득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