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배우, 조지 클루니.
그가 멋지게 나오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지만 나는 그의 화려한 영화들을 제치고 별로 화려하지 않은 이 영화가 좋다.
하와이 거주의 변호사, 맷 킹(조지 클루니)
지상 최고의 휴양지에 사는 그이지만 칵테일에 취하고 파도나 탈 만큼 인생이 한가롭지 못하다.
사정은 이러하다.
아내가 혼수상태다. 모터보트 사고로 인하여.
사고가 있기 전, 그는 아내와 냉전 중이었다.
많은 중년의 부부들이 그러하듯 관계는 소원해졌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지 오래된 상태였다.
아내의 사고소식은 무심해진 남편의 주의를 한방에 돌리는 데 성공한 셈. 23일째 그는 아내를 간호하고 있다.
아내와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서로를 이해할 시간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제대로 된 남편과 아빠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아내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그런데, 이 남자의 계획과 바람과는 무관하게 의사는 가망이 없단다.
연명의 기구들을 곧 제거해야 하며 인사할 사람이 있으면 빨리 만나게 하란다.
막내딸은 학교생활이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학교 상담에 다녀왔다.
아이의 괴이한 정신세계로 인하여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당황시킨 것이 문제였다.
그런가 하면 딸은 친구의 조숙한 발달을 놀리는 바람에 친구 부모의 화를 돋우고, 어느 날은 되바라진 아이를 친구랍시고 엄마 병실에 데려온다.
이제 겨우 열 살의 아이는 그가 가정에 소홀했던 사이 도대체 어떤 아이로 성장한 건지 종잡을 수 없다.
이 아이에게 예정된 엄마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른과 아이의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큰 딸은 더 가관이다.
비싼 사립기숙학교에 보내놨더니 오밤중에 기숙사를 이탈하여 음주는 기본에 마음껏 불량함을 뽐내고 있다.
부모에게 미안한 기색 따위 없고 말만 하면 공격적이다.
그래도 이 상황을 함께 공유하고 돌파할 거의 유일한 존재(막내딸은 아직 어리므로)이므로 그는 최대한 성질 눌러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더 한심하고 더 미친놈 같은 남자 친구까지 대동하여 집에 눌러 앉혔다.
그 녀석은 어른 앞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헛소리를 하거나 시건방을 떨면서 사람 염장을 지르는 재주까지 있다.
왜 우리 집 여자들은 망가지지 못해 안달일까? 엘리자베스는 오토바이, 보트, 술 때문에 알렉산드라는 마약, 나이 든 남자들 때문에 스코티는 엄마 없이 나랑 잘 지낼 수 있을까?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사실 이것만이 아니다.
그와 그의 집안사람들은 그들이 신탁 관리하는 하와이의 섬을 곧 매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원주민 여성이었던 고조할머니와 선교사 할아버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그의 집 안 사람들은 조상 잘 만나고 시절 잘 만난 덕으로 섬의 매각까지 이루어진다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예정이다. 비록 행색은 꽃무늬 셔츠에 헐렁한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협의와 법적 처리를 변호사인 그가 담당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개발업자들에게 섬을 팔아 부자가 될 그에게 섬이 변질될 것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을 뼈 있는 말로 슬쩍 던지기도 한다.
개발업자에게 팔아 한밑천 단단히 챙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대로, 조상이 물려준 그 모습 그대로 섬을 지킬 것인가.
그는 집안의 대표로 이 모든 걸 조율해야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를 가장 동공지진 나게 하는 일은 큰 딸의 폭로로 알게 된 아내의 외도다.
자신과 소원했던 시간 동안 아내는 딴 놈에게 빠져있었다.
열불이 뻗치지만 자초지종을 아내에게 물을 수도 없다.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른다.
혼수상태인 아내에게 추궁할 수 없어 찾아간 지인 부부는 이미 훤히 알고 있으면서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내의 비밀에 대해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참으로 중년의 위기 종합세트가 아닐 수 없다. 하와이라는 천국 같은 휴양지와 곧 부유해질 예정인 그의 환경은 그의 난감한 현실 속에 아무 위안거리도 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부부의 세계의 김희애 마냥 안면근육이라도 부르르 떨어야 할 판인데 그에겐 지금 분노할 시간도, 상대에게 따져 물을 시간도 없다.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아내의 상황을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내와 작별의 시간을 줘야 한다. 아내의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내연남에게도.
그리고 그도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는 상황을 그저 삼킨 채 아내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안녕, 엘리자베스.
안녕, 내 사랑.
내 친구.
내 고통.
내 기쁨.
안녕, 안녕, 안녕.
가족은 군도와 같다.
한 개체를 이루지만 각자 분리된 섬들이다.
그리고 서로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영화를 보면서 중년을 생각한다.
내가 선택하고 벌여놓았던 인생의 조각들, 그것은 세월과 함께 일부는 내가 원하는 대로, 거의 대부분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대로, 심지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치며 정체를 드러낸다.
어쩌면 중년의 시간은 그 모든 게 수면 위로 올라와 정체를 드러내고 탄로가 나는 시간인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란 생각도 든다.
또 하나,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이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을 감당하고 정리해주어야 하는 시간인 것도 같다. 원망하고 슬퍼하고 징징거릴 수 있는 차례는 어쩌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가장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면 응당 감내해야겠지만 문제는 천천히 개별적으로 오지 않고 쓰나미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닥쳐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는 것. 그러니 중년의 위기란 말이 생기는 것이리라.
영화의 제목이 디센던트인 이유를 생각해본다.
표면적으로는 조상이 남긴 땅을 후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라는 물음이기도 하지만 세대를 거쳐 인생과 인생이 이어지는 과정 속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묻는 것 같다.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우연과 배신의 삶을 감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막내딸이 보고 있던 텔레비전 앞에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와서 옆에 비집고 앉는다.
그리고 큰 딸이 다시 아빠 옆에 앉는다.
시선은 화면을 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 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퍼먹는다.
담요 한 장을 함께 무릎에 덮은 채...
그냥 이렇게 삶은 계속되는 것.
그리고 가끔은 한자리에 앉아 무심히 텔레비전을 함께 보는 것.
그것이 삶이고 가족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별로 대단할 것 없이.
어떻게 살 것이며 중년의 위기는 어쩌란 말인가에 대한 답은 아마도 이 소박한 장면 속에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