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서부극의 탄생
서부극(웨스턴 장르)의 대체적 공식은 이렇다.
광활한 사막. 때는 바야흐로 미국 서부개척의 시대다.
이곳엔 개척의 정신으로 혹은 새로운 희망으로 횡단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횡단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주로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원주민들이거나 이미 이권을 차지한 이들(백인)로 신규진입이 달갑지 않은 자들이다.
방해자들은 문명을 모르고 미개하며 잔혹하거나 혹은 문명의 맛을 톡톡히 알아서 탐욕에 절은 자들이다.
이들이 서부의 허허벌판에서 한판 뒤섞인다.
그들은 먼지바람 흩날리는 곳을 달리고 추격하고 총격전을 벌인다. 그러는 사이 악인은 척결되고 정의는 구현되며 질서는 회복된다. 그리고 서부는 계속해서 ‘개발’의 이름으로 질주해 나아간다.
고전 서부극의 시대를 지나 6-70년대는 ‘마카로니 웨스턴’이라 불리는 장르가 탄생했다. 미국의 감독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미국 서부’(미국 서부를 설정으로 했지만 실제 촬영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인 척하며 만든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에선 고전 서부극의 선과 악의 구조를 슬쩍 비틀며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킨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배우의 콤비가 만들어낸 3부작(<<황야의 무법자>>,<<석양의 건맨>>,<<석양의 무법자>>)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기술 좋은 총잡이가 다소 시니컬한 태도로 현상금을 찾아 배회하던 중 ‘불의’한 상황을 만나게 되고 의도치 않게 해결사노릇을 하며 평화를 가져다준 뒤, 자신은 쓸쓸히 어딘가로 떠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말하자면 주인공도 딱히 좋은 놈은 아닌데 그런 그가 보기에도 너무 나쁜 놈을 어쩔 수 없이 상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 과정에서 화려한 총격이 난무한다는 구조를 가진다.
세월이 지나 서부극의 스타였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2)라는 수상한 서부극을 만든다. 이 영화는 자신이 무수히 출연했던 서부극이 가졌던 클리셰(cliché)들을 스스로 폭로하고 반성하는 듯한 영화다.
한 때 현란한 총솜씨의 겁 없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아내를 잃고 남겨진 딸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노쇠한 남자가 되었다. 눈은 침침하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 함께 했던 동료(모건 프리먼)도 이미 맛이 갔긴 마찬가지다. 이런 설정을 통해 영화는 무법자의 불사조 이미지를 스스로 해체하고 총격과 살인이 난무하는 한복판에서 과연 무엇이, 누가 ‘선’이고 ‘악’인가를 묻는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선악구조에 권선징악이든, 변형된 구조의 선악이든 공통점은 있다. 바로 인물 간 행위의 동기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정의의 이름이건 탐욕의 이름이건, 혹은 어쩔 수 없는 양심적 거리낌 때문이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코엔형제가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상한 서부극이다.
이 영화 전체를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인물은 안톤 시저(하비에르 바르뎀)다.
지나치리만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C컬을 가미하여 곱게 말아 빗은 단발머리, 그리고 블랙 진으로 빼입은 상하의.
범상치 않은 외모와 독특한 스타일링을 한 그는 영화 내내 가스통 같은 무기를 들고 황량한 서부를 누비며 차분하게 추격하고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사람을 단박에 죽여 버린다. 감정의 진폭이 배제된 채 차분하게 임하는 시저의 추격과 살인의 연속은 너무도 낯설고 서늘하여 공포가 된다.
그런데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영화에는 이 남자의 '왜'가 없다.
많은 영화에서 보이는 악행의 기원을 찾을 수가 없다. 지난날 가족 몰살 등의 상처에 의한 복수도,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끝없는 탐욕 때문도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악행의 기원을 짐작할 수 없는 악인이 너무도 막강하여 영화가 끝났음에도 악행은 끝난 게 아닌, 공포 가득한 이상한 서부극이다.
# 인간다움을 주의하라
어쩌다가 그토록 이상하고 이상해서 더 무서운 시저에게 추격을 당하게 된 대상은 모스(조슈 브롤린)다.
영화의 주요 사건은 돈 가방을 쥔 모스와 그를 쫓는 시저의 추격전이다. 그리고 그들의 추격 현장을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은 항상 뒤늦게 나타나고 요즘의 악행이 도저히 해석되지 않아 무력감을 느끼며 감회에 젖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쫓고 쫓기는 자와 그들의 대결을 의도치 않게 거리 두고(항상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기 때문에) 해석하는 자의 3자 구도로 이루어진다.
모스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별 하는 일 없이 대낮의 서부 벌판에서 사냥으로 소일하는 남자다. 문제의 그날도 그는 영양을 잡으려고 총구를 겨누었다가 놓쳤다. 그러다가 사막 한가운데 흩어진 차량과 쓰러져 있는 이들을 발견한다.
쓸데없는 호기심의 발동. 그는 그곳에서 마약 상들의 접선과 총격전으로 번진 흔적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돈다발 가방을 들고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나서... 그는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날 밤, 그는 자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살폈던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조직원이 물을 찾았던 기억이 난데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스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한 선택들에 의해 지옥문에 들어선 것은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는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서 현장을 다시 찾는다. 사막 한복판에서 물을 찾던 조직원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어차피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음에도 어쩐지 꺼림칙해서 벌인 뜬금없는 인간다움의 발휘는 그를 본격적인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는 부인에게 친정으로 가 있으라고 말하고 도주의 길에 나선다. 그는 자신의 선택(돈 가방을 주워 든 것)을 되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우연히 취득했고 그래서 벌어진 지옥도를 스스로 감내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우연한 선택이 결국은 운명이었다는 듯이.
모스를 추격했던 마약상들은 현장에서 또다시 시저에게 살해당한다. 이제 현장엔 예전에 죽은 자와 최근의 죽은 자가 섞여 피범벅이다. 사건이 끝난 그곳에 나이 지긋한 보안관 벨과 수사대들이 도착한다.
내 나이 스물다섯에 보안관이 됐다. 새파란 나이지.
조부도 부친도 같은 길을 가셨다......
난 몇 년 전 한 청년을 사형대로 몰아넣었다.
내가 체포하고 내가 증인을 섰지.
그는 열네 살 소녀를 죽였다.
신문에선 '격정의 범죄'라지만, 격정 같은 건 없었다고 했다.
내내 누군가 죽일 생각이었다면서......
요즘 범죄는 딱히 동기도 없다. (벨의 내레이션)
3대째 보안관을 했던 벨의 집안. 그래서 그의 기억 속엔 범죄의 현장과 그곳에서 있었던 선친들의 행적과 구술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무력함을 느낀다.
사건 현장을 쫓는 그와 수사기관은 언제나 한 걸음씩 늦는다. 다른 영화에서도 주인공과 빌런의 시원한 액션을 위해 공권력은 약속이나 한 듯 늦게 나타나주는 것이 일종의 클리셰이긴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뒤늦은 도착은 단순한 클리셰이기보다는 다분한 의도성을 갖는다.
3대째 이어오는 보안관 업무이지만 벨은 어쩐지 직업적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그는 이제 많이 늙었고 지쳤으며 요즘의 범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무력해진다. 보안관으로서의 업무가 과연 효율적인 것인지, 그것이 진짜 세상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맞는 것인지 그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생각이 많고 나이 든 자의 기동력은 떨어진다. 사건 현장은 매번 뒤늦게 발견되고 그럴수록 노인에겐 회한만 많아지는 것이다.
시저로 상징되는 악은 뒤돌아보고 생각할 것 없이 단순하고 선명하기만 한데, 모스는 순간적인 인간다움을 포기할 수 없어서, 벨은 범죄의 현장에서 생각이 많아져서 복잡해지기만 한다.
시저에겐 사회구성원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합의 같은 게 없다. 내면화된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가 없기에 그의 행동은 단순하고 신속하다. 그에게 죽어야 하는 대상은 우연히 선택되거나 자기 앞에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채택되는 것이다.
그런 자가 모스를 추격하기로 한 이상, 돈 가방을 되돌려 받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약 올린 자를 끝까지 추격해서 죽여야 끝나는 게임과 같아진 것이다.
모스의 부인 : 이럴 필요 없잖아요.
안톤 시저 : 하나 같이 그 소리군. 특별한 선심을 베풀지. (동전을 던지고) 정해.
모스의 부인 : 그런 짓은 안 해요. 동전으론 결정 못해요. 당신이 결정해야죠.
시저는 사회적 합의 따위 의식의 저편에 던져놓은 대신, 사람의 목숨을 두고 자신만의 룰(동전 던지기)을 강요한다. 상대가 합의하든 하지 않던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정한 게임에서 상대가 지거나 응하지 않으면 그들을 죽인다.
이 영화에서 특이한 점은 영화의 메인이 시저와 모스의 추격전임에도 정작 시저가 모스를 죽이는 장면은 슬쩍 점프해 버린 뒤 사건 이후의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시저가 모스의 부인을 죽이러 간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스의 부인은 끝내 시저의 동전 게임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죽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장면을 건너뛰고 난 뒤 시저가 모스 부인의 집을 유유히 걸어 나오는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시저에게 살인은 목표한 대상을 죽임으로서 원한을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가져오는 복수극이 아니다. 그에겐 하루하루의 루틴과 일상의 욕구를 해소하듯 이루어지는 살인이므로 때로는 나른하게, 때로는 무심히 이루어지는 행위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도, 영화의 원작인 소설도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을 죽이는 장면은 오히려 건너뛰기를 통해 낯설고 모호해서 무시무시한 살인자를 더욱더 부각시킨다.
# 폭력의 찌꺼기를 먹고 자라다
영화 속에서 안톤 시저의 과거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감정 없는 살인병기인 그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는 우연한 선택과 탐욕과 오해가 불러일으키는 통제 불능한 상황에서 인간들이 빚어내는 희비극에 관심이 많은 감독, 코엔형제의 스타일이자 취향 때문인 것도 같다.
문제적 살인자, 안톤 시저의 악마성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원작 소설에서 잠깐 등장한다.
아들은 최고의 명사수였죠. 아무도 필적 못할 만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네 선생님, 이라고 대답했다.
베트남에서 저격수로 활약했어요.
나는 몰랐다고 대답했다.
마약 거래 같은 짓은 안 했을 겁니다.
네 선생님. 안 했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키우지 않았어요.
그가 말했다. (p. 322)
영화 속에선 모스만이 베트남 참전 용사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안톤 시저 역시 베트남전에서 저격수로 활동했다는 과거사가 그의 아버지를 통해 말해진다.
전쟁이 남긴 흔적들, 폭력의 현장에 흩어졌던 각종 찌꺼기들은 인간에게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살육의 현장에서 단련된 시간만큼이나 시저의 심장은 차가워지고 무뎌졌으며 급기야 감정 없는 살인 병기가 되어 자신만의 게임을 완수하는 괴물로 탄생한 것은 아닐까.
꿈을 꿨어....... 춥고 땅엔 눈까지 쌓였는데 아버지가 말 타고 날 그냥 앞질러 가시는 거야......
꿈이지만 먼저 서둘러 가셔선 어둡고
추운 곳에 불을 밝히고 계실 거란 걸 알았어. 내가 도착하면 날 맞으시려고.
그러다 깼지.
(벨의 마지막 대사)
영화의 마지막, 벨의 대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노인의 무력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슬픈 넋두리다.
갈수록 감당하기 벅찬 폭력의 진화를 ‘보안관’으로 상징되는 치안의 역사가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지체현상.
하지만 이것은 영화 속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폭력을 선제적으로 압도할 평화적 도구를 가질 수 있을까, 혹시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가를 묻게 된다.
심장이 거세된 단순한 ‘악’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벨(토미 리 존스)의 주름마다 가득했던 심란함 만큼이나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