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고통의 끝판왕

by 디비딥

#. intro

봐야지, 하다가 놓치게 되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던 순간을 까맣게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인생 전반이 별로 계획적이지 못한 나에겐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넷플릭스 메인화면에 이 영화가 보였을 때 알았다. 개봉 당시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연도(2002)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놀랐다.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사는 인간에게 21세기의 시간은 막연히 최근이라고만 여겨지나 보다.

<<프리다>>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멕시코의 국민화가,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할 때 그녀의 '고통'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고통을 대하는 방식은 뭔가 달랐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다움'과 '그녀만의' 이야기가 되어 널리 퍼졌다.


<<프리다>>는 고통을 처절히 응시하며 굴복하지 않았던 한 예술가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와 같은 전기 영화다.


# 사고

열정과 호기심과 장난기로 가득한 소녀, 프리다(셀마 헤이엑).

사진사인 아버지는 그런 그녀에게 언제나 '계획'이 뭔지를 자주 묻곤 했다. 영특하고 에너지 넘치는 딸의 열정이 이르게 될 곳은 어디일지 그는 궁금했고 또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수많은 계획 속에 결코 있을 리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

하교 길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부딪치며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쇄골과 갈비뼈, 척추가 부러졌고 철근이 그녀의 골반을 관통했으며 다리는 골절되고 발은 으스러졌다.

호기심과 열정으로 생동하는 어린 소녀의 몸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온몸을 깁스로 감은 채 그녀는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녀를 치료하느라 드는 비용을 고민하며 새어 나오는 부모님의 근심들을 방 너머로 들으면서 말이다. 함께 사고를 당했지만 그녀보다 덜 다친 남자친구는 유학을 이유로 그녀를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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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순 없지만 그녀는 살아있다. 의식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며 그녀 자신이 처한 현실도 처절할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침대의 좁은 사각 프레임 안에 갇혀버린 그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녀는 누운 채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발을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감싼 깁스를 캔버스처럼 활용하기 시작한다. 깁스에 더 이상 그릴 공간이 없어졌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침대 앞에 진짜 캔버스를 마련해 주고 침대 위에는 거울을 놓아준다.


자신이 여전히 자신인 채로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고 그려나가며 확인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녀에게 또다시 '계획'을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짐이지만 언젠간 자립한 불구자가 될 거야.



# 연인과 동지사이

드디어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인한 가는 다리와 부서졌던 척추들을 힘겹게 세우고서. 그녀에겐 모든 것이 절박했다. 자신의 허영이나 충족하며 시간을 낭비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디에고를 찾아간다.


디에고 리베라. 민중벽화를 그리는 그는 이미 멕시코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예술가이자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리는 프리다의 작품을 알아본 그는 그녀와 예술적, 사상적 동지로 함께하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저건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야.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한 적이 있고 바람둥이기까지 한, 나이 많은 남자를 사위로 맞이해야 하는 프리다의 엄마는 그와 딸의 결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술과 사상과 지향을 함께하는 남자, 디에고가 결국 자신에게 안착하리란 희망을 품었고 그의 약속을 믿었다. 때는 바야흐로 새로운 이념(공산주의)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거란 믿음이 만연했던 20세기 초였다. 세상의 약자들이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낙원이 펼쳐지리란 역사적 낙관론에 들떠 있던 때였다.


그녀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리란 낙관을 품었을 것이다. 예술과 사상과 지향을 함께했던 남자가 결국 자신에게 안착하며 말이다. 자신의 의지로 고통을 대면하고 이겨냈듯이 자신의 사랑도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갈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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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한 인간이 갖는 의식적 지향과 리비도가 지배하는 내밀한 욕망은 끊임없이 충돌하며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프리다와의 결혼 후에도 디에고의 바람기는 여전했다. 낭만적 사랑과 성적욕구를 별개로 여기는 그는 섹스를 배뇨 정도로 생각했다. 몸서리칠 만큼의 배신감과 사랑의 상대에게 하찮게 버려진 듯한 초라함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훌륭한 동지였지만 완전한 연인은 될 수 없었던 공허와 외로움.

그녀는 그때마다 캔버스 앞에 앉았고 고통스러운 자신을 응시하며 자신을 그렸다.

사랑의 환상도, 더 좋은 인생과 세상에 대한 낙관도 거세된 시공간 속에 던져진 그녀는 섹슈얼리티와 대상화된 여성성을 벗어던지고 고통에 허우적대는 날 것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내 인생엔 큰 사고가 두 번 있었어. 교통사고와 당신. 당신이 더 나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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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현실주의? 극현실주의!


브르통이 약속했던 것만큼 전시회는 흥미를 못 끌었어.
멕시코 예술가는 여기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야.


20세기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시인이자 미술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프리다의 작품을 주목하며 그녀가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었다. 멕시코의 전통적 요소와 강렬한 색채, 그리고 원초적인 고통과 절망을 처절하지만 자유롭게 표현한 그녀의 작품들은 유럽인들이 보기에 현실적인 논리와 이성의 범주를 넘어 환상을 결합시킨 초현실주의 작품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한 번도 '초현실주의'로 여기지 않았다.


육체의 불완전성과 사랑의 불안정성을 견뎌야 하는 깊은 고독 속에서도 결코 스스로를 버려둘 수 없었던 강인한 예술가의 현실적 투쟁일 뿐이었다.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실을 그릴뿐이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모든 나약한 것들의 집합처럼 보인다.

프리다는 신체적으로 불구이고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외로운 여성이며 변방의 나라 예술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내딛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했고 고통을 깊이 살폈다. 세상의 어떤 시선이나 잣대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과 열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화려한 여성편력을 지닌 디에고만큼이나 그녀는 성을 불문하고 당대 여러 사람들(영화 속에서는 스탈린을 피해 망명한 트로츠키와의 썸을 보여주기도 한다)과 뜨거운 관계를 갖기도 했다고 한다.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한 번도 고통 앞에서 고개 숙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 뜨거운 삶.

한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강인할 수 있었던 것인지 놀랍고 숙연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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