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이백] 절망의 늪을 지나는 속도

by 디비딥

# 절망한 자의 초상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남자, 잭(벤 에플렉).

굳게 닫힌 입과 턱수염에 덮인 무거운 하관.

딱 봐도 외롭고 세상과 섞이고 싶지 않아 작정한 것 같은 모습이다.

외로운 그의 옆에 있는 것은 오로지 술뿐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샤워 중에도 그는 계속 술을 마신다.

영화 내내 음주단속 한번 하지 않는 이상한 동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의 삶은 계속된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잭은 가족들을 만난다.

여동생의 가족과 어머니 속에 둘러싸인 그는 혼자 있을 때와 달리 사회적 표정이 되어 있다. 하지만 애써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딱 보인다.

괜찮은 척, 명랑한 척, 담담한 척.

오빠는 새 소식 없어?
누구 만나는 사람도 없고?
오빠가 제발 사람을 좀 만났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마음이 훨씬 편할 텐데. 오빠가 거기서 혼자 사는 걸 생각만 해도 속상해.
캐시 콜린스가 그러는데 오빠 차가 매일 밤 헤럴드의 술집 앞에 있었대.


가족의 이름으로, 걱정의 이름으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여동생의 질문공세에 잭은 급기야 애써 막아두었던 감정의 둑이 무너지고 만다. 힘들어 보이는 오빠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건넨 말이었을 테지만 준비되지 않은 잭에게는 일방적인 간섭이고 마음에 닿지 않는 잔소리일 뿐이다.

그래서 잭은 동생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탐정이라도 고용하지 그래? 캐시 콜린스는 자기 코가 석자면서 무슨 오지랖이래?
자기는 망할 냉장고 앞에 붙어사는 주제에...... 러닝머신이라도 사라 그래.


다른 이의 고통에 제멋대로 들어와 건네는 무례한 위로는 오히려 잭을 상처 입힐 뿐이다. 그리고 상처 입은 자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거칠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잭의 마음을 알아줄 법도 한 전부인도 그를 상처 입히긴 마찬가지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갖는 설렘도 보이고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잭을 걱정한다.


날 왜 걱정하는데?


극복하고 나아갈 생각을 안 했잖아. 세상을 삐뚤어진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함께 공유했던 고통은 잊은 것일까?

그녀에겐 희망과 활기가 보인다. 그에겐 산다는 일이, 버티는 일이 여전히 고통스럽고 홀로 떠 있는 섬과 같은데 말이다.



# 변화의 실마리


어느 날 그는 모교의 농구감독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는 한때 전도유망한 농구선수였다. 그가 현역일 때 화려한 명성을 얻었던 비숍 팀은 이제 승리의 기억마저 아득한 팀이 되었다.


학교 측은 그의 화려했던 선수시절을 기억하고 그에게 기회를 주려한다. 하지만 그는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거절을 준비한다. 사실 그가 딱히 감독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저 그가 세상 밖으로 발걸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마땅한 거절의 멘트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가지 버전(정중한 거절 혹은 단호한 거절)으로 연습해 보지만 괜한 초조함만 쌓이고 그럴 때마다 냉장고에 가득했던 캔 맥주는 하나씩 사라진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연습했던 여러 가지 거절의 멘트 속에서 그는 이 말을 반복한다.

스스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올 용기가 없다는 무의식적 자기 고백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수많은 캔 맥주를 비워내며 거절을 준비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해 잭은 결국 감독을 맡는다.


직접 확인한 농구팀의 상태는 예상대로 오합지졸 그 자체다.

승리의 기억도 의욕도 없는 선수들에게 그는 너희들을 무시하는 상대에게 자존심을 보이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고 주문한다.


작은 것들부터 시작해.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하는 거야.
작은 것들이 쌓여 결과를 내는 거야.


자신의 삶은 여전히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농구코트에 선 그는 과거의 에너지가 몸 안에 새겨져 있었던 것처럼 열정적이 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말이다.

넌 우리 팀 최고의 선수야. 왜 그렇게 못 믿지?
네가 팀 최고의 선수라는 걸.

그는 경기를 읽는 능력이 출중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극적인 포인트카드 브랜든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지난날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며 범했던 실수들을 돌아보면서 말이다.

사실 이 모든 일을 그가 의지를 갖고 계획해서 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농구 코트에 오르고 감독의 역할을 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숨겨진 회복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해나갈 역량이 있다는 것을

잭, 자신만 모를 뿐이다.


잭이 선수들에게 다그치고 격려하는 말들은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말들이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주문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 관성법칙


잭이 절망한 자가 된 이유. 그는 아들, 마이클을 잃었다. 종양을 앓았던 아들은 갑작스레 잭의 곁을 떠났다. 마이클이 지냈던 병동에는 상황이 비슷한 아픈 아이들과 부모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마이클이 떠났음에도 그들은 병동 아이들의 생일파티에 잭의 부부를 초대했다.

아들의 부재를 위로하고픈 그들의 배려였지만, 잭은 그곳에서 다시 자신의 상처를 대면한다.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그 감정을.

마이클이 살아있을 때에 함께 했던 그들 속에 있는 것이 힘들기는 잭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미겔과 소피아는 우리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초대해 준 거지만 파티에 가니 오히려 더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야. 마이클을 잃었을 때처럼 또 화가 치밀어. 아이들을 보면서 아무나 마이클 대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돼. 나 정말 끔찍한 인간이지?


난 언제나 화가 치밀어. 그래 괴로워. 우리 아들이 보고 싶어.
그 애가 더 좋은 곳으로 갔다는 말은 안 믿어.
그 애한테 최고의 장소는 바로 여기, 우리 곁이니까.


아들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 잭에겐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자신의 상황을 망각하고 농구 코트에서 에너지를 발산할 때,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고통의 기억은 그의 발목을 쥐고 절망 속에 다시 주저앉히려 한다.


또다시 술을 마시고 스스로를 학대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잭.

농구 코트에서의 거친 언사와 상습적 음주로 그는 결국 감독직에서도 해임된다.

다시 원점.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실제로 알코올 중독의 경험을 고백했던 벤 에플렉은 '절망에 빠져 술에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려다가 발목 잡히며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아프고 생생하게 연기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라 착각할 만큼 현실감 있는 연기. 괜히 대배우는 아닌 모양이다.




항공기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잭의 고통을 다시 생각해 본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상투적이고 무례한 위로 따위 집어치우고

그저 그들이 그들의 속도대로 슬픔의 강을 끝내 건너기를 바랄 뿐이다.


혹여라도 다른 이유들로 그들의 슬픔이 커지고 깊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고 지켜야 하는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찾아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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