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썸니아] 진실의 타이밍

by 디비딥

#일관된


나는 ‘과알못’이다. 과학을 잘 모르는 채로 그럭저럭 살아왔다. 적지 않은 나이라고 실감하는 요즘은 잦은 건망증과 기분상태를 뇌과학으로, 사사롭게 감지되는 몸의 변화를 생물학에 기대어 이해해 보는 것도 유용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그만 좀 잘걸.

한참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데뷔작 <<메멘토>>(2001)가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바로 그의 팬이 되었다. 단기기억상실증을 앓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런 인물이 갖는 불완전한 기억의 조각들로 한 편의 긴장감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에 나는 환호했다.


좋아하는 감독이었지만, 조금씩 멀어졌던 것은 <<인터스텔라>>부터였던 것 같다.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얕은 나로서는 그의 이전영화처럼 스토리를 세세하게 따라가기 힘든 지적빈곤을 실감해야 했다. 이후 나는 그의 영화 앞에서는 괜한 긴장을 하는 버릇이 생겼고 왠지 모를 초라함을 느꼈다.


거장도 나이 들면 점차 단순함의 미학을 예찬하고 미니멀한 작품세계를 보이기도 하는 것 같은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런 면에서 여전히 젊은가 보다.

생각해 보면 시공간을 변형하고 모호하게 하여 혼란스러운 주인공을 앞세운 이야기는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한결같았다. 시공간에 대한 감독의 일관된 관심은 작품을 거듭하며 심도 있게 나아가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도 그의 작품 앞에서 계속 초라함을 느낄 예정이다.



#사소한


<<인썸니아>>(2002)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두 번째 작품이다. 각본을 직접 쓰진 않았다. 그럼에도 시공간의 모호성이 만들어내는 인물의 의식적 혼란과 사건의 꼬임은 다른 영화들과 맥이 닿아있다.

윌 도머(알파치노)는 베테랑 형사다. 그는 후배 형사인 햅 엑카트(마틴 도노반)와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 나이트뮤트로 이동 중이다.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수사경력을 가진 그가 굳이 도시(L.A 경찰국)를 떠나 머나먼 알래스카의 사건을 맡은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경찰국의 내사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거래를 해야 할 것 같아요.(by 햅)
이건 모래성이야. 흔들리기 시작하면 와르르 무너진다고. (by 도머)


햅은 마약상들에게 뒷돈을 챙긴 비리를 자백하고 내사팀과 협상을 하려고 하지만 도머는 이를 강하게 만류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해결한 사건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범인이 풀려나기 때문이다. 과정의 사소한 오류로 인해 결과를 훼손시켜야 하는 것을 도머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촉과 감이 발달한 형사다. 범행의 증거가 확보되기도 전에 범인을 먼저 알아보는 탁월한 직관을 가졌다. 그런 능력이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베테랑 형사의 자리에 이르게 했다.

사실 수사 과정 중 벌어진 ‘사소한’ 행위 하나가 있기는 했다. 그가 직감한 범인을 잡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라 여겼다. 그 순간엔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사소했던 행위가 그의 의식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다. 아무도 모르지만 경찰의 내사가 최종적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사를 위해, 범인의 검거를 위해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작은 진실 하나를 깊이 묻은 셈이다.


사소한 사건이잖아요.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요.(by 엘리)
전부 사소한 거짓말과 실수로 시작되지. 경범죄를 저지를 때도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살인을 저지를 때와 마찬가지로. 그게 인간 본성이야.(by 도머)


시골마을에서 단조로운 경범죄만 처리하는 업무가 지겨운 엘리(힐러리 스웽크)에게 도머는 우상과도 같은 선배다. 그의 수사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으로도 그녀는 한껏 들떠 있다. 그래서 그의 말 한마디, 행동들을 그녀는 살아있는 교본처럼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노련한 그가 덫에 빠진다. 멋진 수사성과로 경찰 내사과 사람들 보란 듯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그 시점에 말이다.


소녀를 살해한 범인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그는 엉뚱하게 동료 형사, 햅에게 총을 쏘아버렸다. 햅은 그 일(내사과와 협상하려는 계획) 때문에 자신을 죽인 거냐고 원망을 토해내며 죽는다.

수사팀은 당연히 범인이 햅에게 총을 쏘고 달아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실수를 감춘다. 그에게 묻어야 할 진실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설원으로 이어지는 황량한 알래스카와 밤에도 이어지는 백야.

시간 감각을 가질 수 없는 낯선 공간에서 도머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가 햅에게 저지른 실수는 불면증(insommia)으로 인한 흐릿해진 감각 때문이었다. 범인을 추격했던 계곡은 온통 안개로 둘러싸여 그의 탁월한 촉과 감을 무디게 하고 의식을 혼미하게 했던 것이다.


수사의 과정에서 사소한 단서 하나 놓치지 않았던 관록의 형사는 이제 자신의 행위를 감추기 위해 사소한 흔적들을 없애고 조작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좋은 경찰은 실마리를 찾느라 밤잠을 설치고 나쁜 경찰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잠을 설치는 법이죠. 형사님이 하신 말씀이잖아요.(by 엘리)


지금껏 쌓아온 것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오기,

현장은 모르는 채로 보고서로만 판단하는 내사과 인간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은 그가 진실을 말해야 할 타이밍을 지연시키고 결국은 은폐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과거의 그가 한 말은 현재의 그를 옭아매는 덫이 되어버리고 만다.



#외로운



케이한테 키스를 하고 조금 흥분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더군...... 그런 순간에 비웃음을 당한 적 있나? 마음을 드러낸 순간에 말이야......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다 털어놓으니 기분이 좋군. 이제야 곤히 잘 수 있겠어.
(by 핀치)


도머가 맡았던 살인사건의 범인은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 월터핀치(로빈 윌리엄스)였다. 영화는 범인을 길게 감추지 않고 비교적 초반부에 등장시킨다. 그가 직접 도머에게 전화를 걸면서 말이다.


그는 도머 형사가 햅을 실수로 죽인 현장을 보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용해 도머 형사를 압박하고 이용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자신을 검거할 수 있는 형사임에도 그는 도머와 자신이 비슷한 상황과 능력을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백야에 적응할 수 없어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죽일 의도가 없었는데도 살인에 이르게 된 상황도,

그들은 닮아 있으며 이 때문에 도머 형사가 자신과 대화가 될 만한 상대라고 여긴다. 물론 도머의 생각과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망상으로 말이다.


그는 고립되고 외로운 자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에 팬이 된 소녀(케이)와 비밀스러운 관계로 최소한의 소통 아닌 소통을 할 뿐이다.


그는 억압된 자다. 자신을 향한 소녀의 존경과 선망을 즐기고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는 어른인 척 하지만 사실 그는 그녀에 대한 성적욕망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순간(키스) 당했던 비웃음은 내면의 파괴적 본능을 드러내는 도화선이 되고 살인에까지 이른다. 핀치의 이러한 행위는 ‘외로운 늑대’ 형 범죄의 특징을 보여준다. 외로운 늑대는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다니는 늑대를 뜻한다. 무리를 짓는 종의 특성을 무시하고 홀로 다니는 늑대는 집단에서 자의적으로 이탈했거나 버림받은 경우이다.

그런 이들이 외로움 속에서 그들만의 망상과 논리로 세상을 이해했을 때, 그들의 어긋난 의지는 결국 참사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의 논리로 합리화시키고 수사하는 형사의 약점을 잡아 협박을 소통이라 착각하는 핀치의 행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더 많아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20여 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연기력 뛰어난 로빈 윌리엄스가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 ‘악인’이 되어 뛰논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은 예술을 모방하는 순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우연의 순간과 우발적 선택이 만들어내는 것일지라도

헛발 짚은 잘못된 길 위에 벽돌을 올릴 필요는 없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발목을 잡히고도 진실의 타이밍을 계속 유예시켰던 도머 형사를 통해서 말이다.

너의 길을 잃지 마.


존경했던 선배의 실수를 묻어주려고 했던 엘리에게 남긴 도머 형사의 말은 진실의 타이밍을 한참 놓친 선배의 절절한 유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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