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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Nov 10. 2020

세 식구의 지독한 원룸 살이

가족이 웬수지..

빚쟁를 피해 야반도주를 하듯, 술취한 아빠를 피해 도망쳤다. 드라마에서나 봤지,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할머니는 중에 있던 몇만 원을 방바닥에 내려고 집을 나섰다.


"걸로 며칠은 버 수 있겠지. 돈 없으면 술도 못 마실 거야." 

리고 아랫집 이웃에게 들러 가끔 아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봐달라 부탁했다.


그동안 나는 책 옷가지들을 챙겨서 고모 차에 실었다. 고모는 이대로 있다간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다며, 아빠가 나아질 동안 '잠시' 떨어져 있자 했. 그때만해도 한여름에 떠난 우리 다음 해 1월 돌아게될  미처 상상 하지 못했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고모네 집 근처 부동산이었다. 당장 오늘 밤부터 잘 곳이 필요했다. 부동산 중개업자를 따라 원룸 몇 군데를 둘러본 뒤 가장 저렴한 집으로 계약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세 식구의 원룸살이가 시작.


할머니 할아버지는 방에 자리를 잡고, 나는 주방에 이부자리를 고 누웠다. 낯선 천장을 쳐다보니 그제서야 늘 있었던 일들이 감이 났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 내 인생 볕 들 날이 없 건. 부모 도움은 바라지도 않으니 방해라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나에겐 그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집에 제대로 된 문이라고는 화장실과 현관문 밖에 없었다. 방과 주방 사이 미닫이 문이 있는데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문보단 창문에 가까웠다. 할아버지 방에서 TV를 켜다, 주방까지 화면이 번쩍번쩍 비춰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방음? 하, 말을 말자. 짜증이  올라다. 사적인 구역이라고는 화장실전부 앞으로 옷도 거기에서 갈아입어야할 판이. 이런 데서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 


다음 날 아침. 고막이 찢어 듯한 큰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가 어두우신 할아버지는 TV 소리를 최대치로 높였고, 나 귀청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집이 좁아서 TV소리를 피할 데가 없다. 게다가 나는 공시생이! 주섬주섬 일어나 인터넷 강의를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아봤지만 TV 소리에  묻혀버고 말았다. 돈이 없으니 밖에 나갈 수도 없고, 할아버지보고 하루종일 벽만 보고 있으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 보청기 끼고 TV 소리 좀 줄여줘요!"

어차피 껴도 잘 안 들린다며 불편해서 싫다고 하셨다. 목청껏 리를 질러 말해야 겨우 알아들으시면서, 한테 버릇없게 소리 지르지 말라 셨다. 어우, 혈압이야.


나는 시험에 대한 압박감으로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데 두분은 무일 없던 것처럼 태평스럽게 TV 보 는 게 싫었다. 나만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외로웠다.


실은 이런 이야기들 나누고 싶었다. '갑자기 이런 데서 살게 됐는데 괜찮니? 놀랬지, 속상하지?' 한마디의 위로만으로 충분했는데 그 한마디를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돌아오는 건 버르장머리 없는 손녀 취급이었다. 밥 먹여줬음 됐지 어쩌라는 거냐며. 그분들에게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짜증 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괜찮냐는 말 한마디 말도 없이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병원에 가든가, 왜 자꾸 귀찮게 굴어?

기대와는 달리, 자꾸 상처만 받았다. 세대 차이인건지, 성격 차이인 건지(아마 둘 다겠지) 도통 대화가 되질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점점 입을 닫기 시작했 나중엔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렸다. 


이렇게 원룸에 살게 된 것도 다 할머니, 할아버지 탓 같았다. 아빠를 너무 오냐오냐 잘못 키워서 결국 이 사달이 난 라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결혼한 지 10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할아버지에게 前 부인이 있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해서 우리 할머니와 재혼하셨으니, 그것까지 합치면 약 15년에 드디어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귀한 자식일수록 더 바르게 키웠어야 했건만, 너무 오냐오냐 서인지 아빤 뭐든  포기해버렸다. 고등학교도 퇴학당하고, 군 복무도 마치지 못했다. 아버지가 여러 가게까지 차려주며 지원해줬지만 무엇 하나 몇 개월을 넘은 적이 없었다.


옛날엔 할아버지가 월세 받는 방만 11개가 있었다고 했다. 맏이였던 큰 고모는 어릴 적에 미제(미국 제품) 옷도 많이 입을 정도로 부유하게 자랐다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낡은 단독주택 1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아빠가 다 말아먹고. 내가 태어났을 땐 이미 가난해진 뒤였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다. 이 좁은 곳에서 셋이 함께 지낼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공부는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할 것 같았다.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사치스럽게 공부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동안 내 유일한 동아줄공부이었다. 지역 내의 최상위 고등학교를 갔고 거기서도 반 3등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모의고사 점수도 늘 좋았다. 하지만 결국은 돈이 없어서 전문대에 갔다.


친구들이 20살의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나는 곧바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쉼 없이 달렸다.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용돈을 벌고, 성적 장학금을 받기 위해 밤새 공부하고, 전체 수석으로 명예롭게 졸업까지 했는데, 또다시 모든 게 다 무용지물이 됐다. 우연히 본 세무직 시험에 붙었으니, 이번 행정직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시점에 공부를 중단해야 하다니…….


기를 쓰고 노력해봐도 불행이 자꾸 내 앞을 가로 막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한 걸음 도망치면 불행은 두 걸음 빨리 쫓아왔고, 내가 전속력으로 뛰어가면 더 빠르고 격렬하게 나를 추격해왔다. 이겨내면 이겨낼수록 더 강한 고난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하고 나를 시험하는 . 오늘 지치거나 내일 지치거나의 차이일 뿐 결국엔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승산없는 싸움 같았다. 

 

가족이 웬수라는 말이 딱 내 얘기였다. 간절히 기도하면 아빠가 술을 끊을 거란 기대도 접었다. 도도 공부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앞으로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게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망 기대 사라지자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왔다. 고장난 장난감이 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거지같은 하루를 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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