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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Nov 21. 2020

난생처음 정신과에 간 날

우울하다면 지금 당장 달리기를 할 것!

저 멀리 3층에 정신건강의학과 간판이 보였다. 긴장된 발걸음으로 난생처음 정신과에 발을 디뎠다. 

  

최근 일주일간

잠을 설쳤나요?

식욕이 없어졌나요?

갑자기 울음이 나왔나요?

미래에 대해 암담하게 느껴졌나요?


예. 예. 예. 예.. 문답지를 쓰면서 알게 됐다.

나 진짜 좀 문제가 있구나. (위 문답지 내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 좁디좁은 방 한 칸짜리 원룸, 사이가 나쁜 세 식구가 온종일 붙어서 다닥다닥, 합격을 코앞에 두고 3년간 준비해 온 공부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까지.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저녁 10시 되 주방 한구석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자정이 되도록 잠은 오질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30분쯤 지났나 싶핸드폰을 확인했 3시간이 지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커튼이나 블라인드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창문 너머로  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집 앞을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해졌다.


벌써 아침. 밤을 꼴딱 새 버렸.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벽에 기대앉았더니 갑자기 음이 밀려왔다. 중력을 버티지 못한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었다.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맨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 뒤로도 잠 못 이루는 고문 같은 날들 계속됐다. 나사 빠진 사람럼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밤엔 거의 못 자고 낮에만 잠깐씩 잘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할아버지의 TV 소리 때문에 금방 깰 수밖에 없었다.


렇게 일주일을 보내 와, 도저히 건 아니다 싶어 정신에 오 된 것이.




내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환자분, 간단하게 인생을 100m 달리기라고 생각해 보죠. 그럼 환자분은 출발선 보다 100m 뒤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뒤처져 있죠? 물론 본인보다 더 뒤에 있는 사람도 있긴 해요. 장애를 가진다던지, 그런 사람들.."


'네? 뭐라고요?'


"환자분이 아무리 속력으로 달려도 보이는 건 남들의 뒤통수뿐일 거예요. 열심히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죠. 난 왜 남들만큼 잘하지 못할까 싶어 그동안 자존감도 낮았을 거예요. 어쩌고저쩌고……."


의사는 나 같은 상황에서 우울증과 불면증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란 얘길 하고 싶었겠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언저리부터 묘한 반발심이 올라왔다. 내 인생이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었는데, 겨우 십오 분 남짓한 대화로 나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 게 기분 나빴다. 특히 문제 해결에 대한 자존감이 낮을 거라는 말 뇌리에 박다(물론 사 앞에서는 아무 반박못하고 바보 같이 네, 네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만).


론적으로 3개월, 6개월씩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했지만 오랫동안 약을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됐다. 당장 오늘 병원 진료비만 해도 얼마가 나올까 걱정스러운 마당이었다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길 바랐는데 번짓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았다. 멀리까지 괜히 왔다 싶었다. 위로는커녕 자존심에 상처만 받고 말았으니까. 


병원을 나오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동안 공부하느라 친구들 연락을 안 한 지도 오래됐고, 너무 멀리 이사를 와서 친구를 부르기도 부담스러다. 게다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니 연락하기가 더 어려웠다. 연락처를 잠시 뒤적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오늘 들었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자존감이 낮을 거라는 말이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 맴돌았다. 생각할수록 약이 올랐다. 그동안 상황이 받쳐주지 않았을 뿐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긴 아까웠다.


'내 자존감이 낮다고? 좋아, 그 의사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내고 말겠어.  없이도, 내 힘으로 불면증과 우울증극복해 낼 거야!' 


이것도 사실 자존감이 낮아서 괜히 욱한 걸 지도 모르겠다. 의사말이 맞는 걸지도. 어쨌거나 집 앞에 다다랐을 땐 어느새 가슴속에 단단한 오기가 심겨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나를 버티게 한 건 오기가 팔 할이었다. 콩국수를 먹을 때도 그랬다. 국물까지 다 먹으라고 하면 배불러서 못 먹겠다 싶다가도, 너 이거 못 먹겠지? 하면 오기가 생겨서 그릇 째 벌컥벌컥 들이켜던 나였다. 희한하게 "힘내, 잘할 수 있어."라고 하면 힘이 하나도 안 났는데 "야, 너 그거 못해. 그냥 포기해."라고 하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힘이 불끈 솟았다. "두고 봐. 내가 하나, 못하나 내기할래?"


내 안에 청개구리 유전자라도 있는 건지. 상대방이 일부러 그러는 걸 알면서도 매번 바보 같이 걸려들었다. 친구들이 그런 나에게 '잡초'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밟으면 밟을수록 다시 살아나고, 힘들면 힘들수록 더 강해지는 잡초를 닮았다고.


의사가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처방이 됐다. 드릉드릉, 잠들어 있던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못할 것 같아? 뭐든지 다 극복해 버리겠어! 그게 뭐가 됐든, 다아아아!!


일단 불면증부터 극복해 보기로 했다. 잠을 잘 자면 우울증도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숙면을 취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낮에 최대한 햇빛을 많이 쬐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일 달리기로 했다.  


처음엔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기력해진 몸을 지로 일으서 운동화를 신기기까지 수많은 격려와 다짐이 필요했다. 처음엔 땅바닥만 보며 걷다가, 조금씩 고개를 들어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감 세일을 목청껏 외치는 슈퍼 아저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장난치는 아이들, 행복한 모습으로 케이크를 들고 가는 연인까지……. 나와는 다르게, 사람들의 표정엔 생기가 가득했다. 그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였다. 


매일 걷다 보니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가볍게 한번 뛰어보았다. 때로는 거친 숨을 몰아쉴 만큼 빠르게 달려보기도 했다. 달리는 동안  없이 다짐했다. 어떻게든 살아야지. 이겨내 봐야지. 이다음에 또 다른 시련이 날 넘어뜨린다 해도, 지금은 최선을 다해 일어서 봐야지.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으니까. 누군가 내 삶에 똥을 싸지르고 가도,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난들 그걸 치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끝없이 가라앉는 난파선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가슴속이 후련해지고, 작은 원망들이 훌훌 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 달려라 하니가 되어 달리고 또 달렸다. 지금 내가 가진 건 튼튼한 두 다리 밖에 없었다. 


송골송골 마에 맺힌 울.

뜨겁게 올라간 피부의 온도.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

온몸에서 두근대 경쾌한 맥박소리까지.

경직된 머리와 마음이 아니라 바삐 움직이는 몸에 집중했다.


내 귀에 들릴 정도 차게 팔딱 심장 소리가 넌 할 수 있다고, 겁먹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듯했다. 


언제까지 한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것 또한 내 삶의 일부란 걸 받아들여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왜'냐고 묻지 않기로 했다. 왜 내 인생은 이런 거냐며 원망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또 한 뼘 더 훌쩍 성장해 있을 거라고. 나의 가능성은 아직 시작해보지도 않았다고.


달리는 동안 들었던 생각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밥을 먹다가도, 잠자기 전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메모장을 읽었다. 그렇게 기로 벼려진 칼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시련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끝까지 해보자. 지금까지는 내가 졌지만 지막에 웃는 게 진짜 승리야.

좌절아, 내가 너를 좌절시킬 것이다. 

포기야, 이젠 내가 너를 포기시킬 것이다.

짓밟힌 잡초처럼 다시 일어나, 네가 학을 떼고 도망가서 다신 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 거야.


어지럽던 마음 조금씩 차분해지고 맛도 돌기 시작했다. 잘 잘 수 있었다.

었던 의 욕구들이 다시 차올랐다. 내 삶은 다시 정상궤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달리기>-S.E.S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 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 인걸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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