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길에서 4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와 마주쳤다. 근무했던 학교 근처도 아닌 지하철로 족히 40분은 가야 하는 뜻밖의 장소였다. "선생님 저 기억하시죠?!" 제자는 내가 자신을 혹 잊었을까 염려했는지, 교복에 수놓아진 이름표를 흔들며 보여주었다. 동우(가명)는 작년에 이 동네로 이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곤 당시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이름을 말하며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동우와 만나 익숙한 제자들 이름도 들으니 잠시 그 해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누군가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건 특별하다. 그리고 그 만남을 오래 이어가는 것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동 할머니'를 알게 된 지는 8년이 지났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대학병원 정형외과 3인실 병동이었다. 나는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몸에 박았던 철심을 빼러 왔다. 그동안(심을 넣고 빼는) 수술을 여러 번 받았던 나였다. 병원생활은 이제 익숙했다.
정형외과 병동은 좋게 말하면 활기가, 다르게 말하면 소란했다. 의사들은 회진할 때마다 잘 먹고 움직여야 빨리 퇴원합니다. 를 강조했다. 수술 후에 대개 하루가 지나면 특별한 제약 없이 일반식이 나왔다. 보호자들도 기력 보강이나 뼈 붙는 데 좋다는 각종 보양식을 병실로 가져왔다. 복도도 보조기구를 차고 걸어 다니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뼈가 붙는 데 오래 걸리는 환자들은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좁은 병실에서 커튼 하나를 맞대고 지내야 하니(특히 6인실은) 환자들, 간병인, 보호자들 사이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움직이질 못하니 긴 시간을 채워줄 대화거리를 찾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젊은 환자인 나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몇 번의 입퇴원을 거치며 나름의 대처방법을 찾았다. 일부러 TV볼륨을 줄여달라거나, 취침시간이니 조용히 해주세요, 같은 바른? 말을 딱딱하게 하며 선을 그었다. 이번 수술이 끝나면 내 몸에 철심은 없을 터였다. 이제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 의사도 심을 박는 것에 비하면 빼는 수술을 간단하다며(물론 전신마취를 하겠지만) 길어야 열흘 입원일 거라고 했다.
'하동 할머니' 역시 심을 빼러 왔다. 지인이 이곳 대학병원에 근무해서 차로 3시간이 넘는 거리에서 오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하동이라는 지명이 낯설어서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게 수술의 전후사정에 대해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다만 내가 수술 후 이틀째가 되던 날, 혼자 몸을 일으켰을 때 같이 좋아해 주셨다. 그녀는 이곳에 온 덕분에 수술이 잘 되었다며 의사들이 회진을 돌 때마다 감사하다고 했다. 간병인이 계셨지만 그녀의 자식들은 매일 교대로 그녀를 찾았다.
"어쩌면 한결같이 자식분들이 오네요. 좋으시겠어요." 나를 간병하던 엄마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럴 때면 '하동 할머니'는 안 와도 되는데라며, 너무 오래 누워있었다며 얼른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할머니가 먼저 퇴원을 했다. 일찍 퇴원할 거란 말과 달리 나는 병원에 좀 더 있어야 했다. 서로 건강하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가시면 너무 일 많이 하지 마시라는 말도 함께.
그 만남을 계기로 매년 할머니는 고춧가루와 작물을 우리 집에 보내주시고 엄마는 돈을 부친다. 그리고 가끔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렇게 하동할머니와 엄마는 잠깐 스쳐갈 수 있었던 연을 붙잡았다.
시간이 흘러 가족끼리 남해여행을 갔다. 올라오는 길에 하동 이정표가 보여서 할머니께 연락했다. 아쉽게도 엇갈려서 할머니 얼굴을 뵙지 못했다. 대신 할머니네 집 대문 앞에 복숭아 한 상자를 놓고 돌아왔다. 햇빛이 내리쬐는 논과 밭, 혼자서 사신다는 할머니네 집 앞마당을 눈에 담고 돌아왔다. 자신은 뼈가 튼튼하게 타고난 것 같다며 이빨이 훤히 보이게 웃으시던 할머니 모습이 생각났다.
우리 집에서는 그녀는 '하동 할머니'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렇게 잠깐의 마주침이 8년으로 이어졌다. 엄마가 전화를 할 때면 늘 내 안부를 먼저 물으신다는 할머니. 고춧가루를 꺼내 요리를 할 때마다 할머니의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다.
“네, 할머니. 저는 잘 있습니다. 할머니도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