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으로 만난 나의 동료들 Part. 2 (2023년 여름 이후)
교사들에게 2023년 여름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자발적으로 집회를 열어서 지속이 되고 있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매회 검은 물결을 그리던 외침은 그동안 참았던 것들이 터진 것이었다. 그리고 선배로서, 동료로서, 안타까운 죽음들을 추모하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뜨거웠던 여름 이후에 만났던 동료들의 대화를 엮었다. 쉬는 입장에서 9월 4일에 대해 물어보기는 조심스러웠다. 혼란의 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당시 현장 분위기를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동료들의 개인적인 고민과 생각을 함께 이야기했다.
내 나이 또래니까 다들 10년 차 언저리 경력들이다. 주변에 결혼을 했거나 육아하는 친구들도 많지만, 나처럼 쉼 없이 10여 년 차를 채워온 두 명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둘 다 이제 이일에 익숙함을 넘어 능숙했다. 10년이 지나다 보니 박차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는 주저하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 결국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왜 이 일을 붙잡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친한 동생 D는 올해 학교를 옮겼다. 6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정말 동학년과 마음이 잘 맞아. 회의시간에 수업방법, 놀이활동, 보드게임활동 같은 것을 같이 논의해. 올해 프로젝트 수업을 많이 했어. 나는 프로젝트 수업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
D는 나에게 그동안 아이들과 활동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학교 내에서 함께 한 캠핑, 아이들이 마치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어 직접 자신이 조사한 그림을 서로 소개하고 발표하는 수업을 했던 방식을 말해주었다. 동학년과 함께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다고 했다.
“내가 시간을 투자하고 고민한 프로젝트들이 교실 안에서 시너지를 일으키고, 아이들이 즐거워할 때 매력을 느껴. 그런데 프로젝트가 끝나면 아이들과 잠시라도 거리를 두고 싶어. 에너지를 쏟았으니까. 하지만 담임은 그렇게 못 하잖아. 내가 지쳐도 쉬고 싶어도 계속 봐야 하잖아.”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시 동학년 자랑으로 넘어왔다. D동생이 신규였을 때 나와 동학년으로 만났다. 자신은 지금까지 만났던 동학년 선생님들이 좋아서 그들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내 곁에는 열심히 하는 동료들이 많은데 그중에도 단연코 E언니가 최고이지 않나 싶다. 그녀는 첫 만남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이 직접 활동책을 제본해서 25명을 나눠주고 밤늦게까지 수업을 준비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게 좋아서 했던 언니였다. 그동안 학년부장과 업무부장도 많이 했다. 작년에 E언니가 좀 지쳤다며 내게 말했다. E언니도 올 1학기에 휴직을 했다. 쉬는 동안 언니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보다 한 템포 빠르게 2학기 복직을 했다. 복직을 하면서 속으로 목표를 세웠다고 했다.
“이제는 힘을 좀 빼고 싶어.”
복직하고 어땠어?라고 물었다. 힘 빼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고 E언니는 답했다. 언니와 잠깐 대화를 할 때면이 일에 워낙 열정적이라 교사가 천직 같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정말 하고 싶어서 선택했구나라고 느꼈다. 그랬던 언니가 이번 만남에서는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
“이번 여름의 우리를 보면서 이제 교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아.” 언니 입에서 ‘그만둔다’는 말이 나와서 신기했다.
“그럼에도 나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어.” 언니는 말을 이었다.
언니에게는 대학동기이자 같은 교직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와 방학이면 자주 여행을 간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계속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게 소중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E언니는 교직생활에서 처음 만난 첫 제자들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느덧 성인이 된 제자들과 여전히 자주 만났다. 이제 술도 사주고, 콘서트나 여행도 같이 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 아이들과 첫 기억이 좋아서 그 원동력으로 지금까지 열심히 했어. 그중 한 제자와 올여름에 콘서트를 갔어. 같은 동네 사니까 끝나고 데려다주었는데 그 아이가 내게 편지를 내밀더라고. 그 편지를 읽고 울컥했어.”
편지에는 ‘선생님이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쓰여 있었다고 했다. 자신을 응원해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고 언니는 내게 말했다.
교사란 직업을 생각하면 ‘안정적이다’가 따라온다. 연금, 복지, 안정 이런 장점들도 있다. 내가 교대를 선택할 때도 이런 이유도 있었다. 근데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결국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 같다.
왜 그럼에도 이 일을 붙잡고 있었는가? 나도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수업’이었다. 교생실습에서 처음 수업을 구상하고 직접 해보면서 이 일의 매력을 발견했다. 마치 작품 한 편을 구성하는 전달자 같았다. 나는 작가이고 감독인 동시에 배우도 될 수 있었다. 잘 구현한 수업을 만들고 싶었다. 수업은 관객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박수갈채를 받는 배우처럼 신났다.
현장에 내던져지고 나서야, 수업이 주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경력이 쌓이고 담임 업무에 익숙해졌을 때 그래도 수업에 대한 욕심은 놓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힘을 줘서 준비한 수업에서 기대와 다른 반응을 만난 적도 많았다. 그럴 때면 괜히 화가 났다. 오히려 힘을 빼고 금방 준비한 수업에서 애들이 의외로 빵빵 터지기도 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똑같은 수업을 구성해도 아이들에 따라서 제각각 반응이 달랐다. 그랬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이 열광하고 좋아하는 수업이 좋은 줄만 알았다. 그게 다가 아니구나를 알기까지 오래 걸렸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화려한 교구 없이도 충분히 배움이 일어나는 수업을 더 고민하게 되었다. 수업에 힘을 빼보기도 했고, 작년에는 수업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음에 찾은 건 이 일이 마치 나를 단련시키는 ‘수련’ 같았다. 돌이켜보면 좌절과 부침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단단해졌다. 전에 겪은 과거의 상처들에 잔 매듭을 짓기도 했다. 맷집도 조금씩 세졌다. 좋은 동료들도 생겼다. 그래서 덕분에 나를 세울 수 있던 수련과정이 아니었나 싶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지금은 우선 ‘강제성이 있는 루틴’ 같다. 일 덕분에 삶에 규칙적인 생활이 유지되었다. 그것도 돈을 주는 루틴이지 않나. 그리고 ‘아이들과 즐거운 순간’이 있었다. 아이들은 참 솔직하다. 표정에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그래서 상처받을 때가 더 많지만). 생동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이 귀여워서 무장해제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아이들 앞에서 한없이 무뎌진다. 그런 잠시지만 서로 연결되었다고 느끼는 순간들도 소중했다. 마지막으로 ‘글감 얻으러 직장 다니죠.’란 문우의 말이 생각났다. 글감 얻으러 출근하지라고 생각하면 발걸음이 좀 가벼워질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그럼에도 이 일이 내게 주는 의미를 동료들과 만나며 나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