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 불을 최대로 키웠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감자와 당근을 넣었다. 재료가 볶아지고 버무려지도록 팬을 밀고 당겼다. 팬을 다루는 건 힘이 아니라 손목의 스냅과 리듬이었다. 손놀림이 빨라졌다. 왼손은 팬 손잡이를 잡고 고요히 움직였고 오른손은 양념과 재료를 빠르게 버무리고 식감을 살려 접시에 담았다. 이십 년 이상 분식집을 운영하면서 어깨너머로 주방 돌아가는 사정과 메뉴별 레시피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하는 것은 크게 달랐다. 주방을 맡은 지 다섯 달 되었다. 미숙함의 대가는 손과 팔에 남은 상처들이었고 팔목과 어깨, 허리의 시큰거림이었다. 급한 마음에 프라이팬을 세게 잡아당겼다. 볶음밥 재료들이 팔과 몸통으로 쏟아지는 바람에 꿈에서 깼다.
무슨 일이든 가슴에 오래 담아두지 않고 툴툴 털어버리는 성격이어서 웬만하면 꿈을 꾸지 않았던 내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달라졌다. 어느 날엔 집채만 한 마스크에 눌려 허우적거렸다. 아메바처럼 생긴 끈적거리는 세포 덩어리들이 내 목에 달라붙어 숨통을 조이기도 했다. 검정 마스크의 표정을 알 수 없는 덩치 큰 남자에게 쫓기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도 했다. 악몽의 베이스캠프에는 불안함, 두려움, 간절함, 그리고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휴대폰의 알람을 해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날씨 앱을 누르니 오후에 비 올 확률이 육십 퍼센트였다. 우산을 챙겨 백팩에 넣고 마스크를 썼다. 아파트 1층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5층 아파트 높이보다 웃자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사열하는 의장대 병사들처럼 미동도 없었다.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을 즈음 ‘카톡’ 소리가 울렸다. 단톡방 ‘쓰리고’였다. 오늘 저녁 번개 잊지 않았지, 내가 쏜다는 문자였다. 짠돌이로 유명한 정석이 한턱낸다고 하는 것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댓글을 막 올리려고 하는 찰나, 난 공무원이라 일곱 시 전에 도착이라고 남진이 문자를 올렸다. 일곱 시 반 정도면 한가하니까 그 시간에 맞춰서 오라고 답 문자를 보냈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터미널 바로 옆의 허름한 상가 건물 지하에 고고장이 있었다. 쓰리고는 그 고고장의 단골 삼인방을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고고와 디스코 열풍이 불던 그 시절, 나팔바지에 가발을 쓰고 고고장에 몰래 들어가 ‘칭기즈칸’과 ‘헬로 미스터 몽키’를 따라 부르던 친구들이 어느덧 고혈압과 당뇨를 걱정하는 오십 대 후반의 중년들로 변해 있었다. 변화가 많은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인지 요사이 쓰리고 멤버들은 번개만 치면 출석률 백 퍼센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