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2022년까지
그날 이후, 15년째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2008년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겨울방학을 맞아 집 근처 맥줏집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대학생을 상대로 병맥주를 싸게 파는 가게였는데 겨울에도 장사가 잘 됐다. 32살의 젊은 남자 사장님은 내게 마시고 싶은 맥주가 있으면 마음껏 마시라고 했고 가끔 용돈도 챙겨줄 만큼 자상했다. 보기 드문 고용주였다. 알바를 한 지 한 달쯤 됐을 때, 사장님은 오는 길에 샀다며 내게 다이어리를 주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기분은 좋았지만 '초딩 이후로 다이어리를 안 썼는데 쓰려나?' 생각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책상 어딘가에 다이어리를 던져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몇 주가 지나고 사장님이 가게 테이블에 앉아 무언갈 열심히 하시길래 살며시 봤더니 다이어리를 쓰고 있었다. '오잉?????!!?!?! 으와...! 사장님은 진짜 다이어리를 쓰는구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이어리를 쓰는 성인 남성의 모습'이 당시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평소 사장님의 여러 부분을 존경했던 나는 그날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무엇을 적어야 할지 어리둥절했는데 일주일쯤 지나니 적을 게 넘쳤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다이어리가 올해로 15년째다. 내 몸 어딘가에 다이어리 DNA가 존재하고 있었던 건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해도 빠짐없이 썼다. 지난 다이어리를 보면 '뭘 이런 거까지 적었데(똥 싼 이야기;;)' 싶을 만큼 아주 사소한 일부터 인생의 전환점이나 흑역사, 새로운 인연을 만나 타오르고 바스라진 추억들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나는 왜 매년 다이어리를 썼을까?' 그 이유를 되짚어봤다. 스스로 거창한 이유를 기대했는데 결론은 싱겁다. '그냥 어쩌다 보니 계속 썼다'
그래도 '그냥 어쩌다 보니'로 끝내면 아쉬우니까 3가지 정도로 이유를 다듬어 봤다. 그것은 바로 '정리하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비우기 위해서'다. 첫 번째 '정리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보고 잘한 점과 아쉬운 점을 적어 하루를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다음에도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요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반성도 하고 내일 할 일도 적었다. 두 번째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날 있었던 중요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다. 가령 첫 출근, 첫 월급, 첫 연애, 첫 이별처럼 살면서 처음 겪는 일과 인생의 커다란 사건들을 적어 두었다. 적는 행위를 통해 행복을 곱씹기도 하고, 아픔을 상쇄시키기도 했다. 겪은 일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성찰은 타인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 '비우기 위해서'는 내 속에 독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한테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짜 속 마음을 다이어리에는 필터링 없이 마음껏 적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어서 그 사람이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증오와 저주를 다이어리에 쏟아내며 화를 삭였다. (철없는 20대 초반에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럴 때가 있지만..) 예민한 성격 탓에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이 많았고 세상으로 받은 상처와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적으며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 보니 다이어리는 나의 비밀친구이자 대나무 숲이었다.
그러면 글 잘 쓰겠네?!
이쯤 되면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오랫동안 다이어리를 쓰면 '생각 정리를 잘한다거나, 감정을 잘 들여다본다거나, 글쓰기를 잘한다거나' 하는 발전이 있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자신 있게 '맞다'라고 대답한 적이 없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애초부터 어떤 능력을 개발할 목적으로 다이어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이 좋아지고 있구나'라고 체감한 적이 없다. 아마 발달했다면 나도 모르게 그랬을 것이다. 다이어리 쓰기는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을 텐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기/기록을 전략적으로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난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다이어리라는 콘텐츠 하나로 몇 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관련 용품도 파는 유튜버를 보면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나도 앞으로 다이어리를 전략적으로 써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소일거리인 다이어리가 갑자기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지금처럼 순수한 애정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만 알아볼 수 있어서 더 재밌다!
15년째 다이어리를 써서 좋은 점은 '와~ 내가 15년이나 썼구나'처럼 나의 꾸준함이 기특하다. 그리고 이전 다이어리를 훑어보다가 '아! 이때 이런 연애를 했구나..'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 '맞아 맞아, 내가 이런 걸 깨달았었어!' 등의 추억 소환을 통해 과거의 나를 재발견한다. 남의 일기만 재밌는 줄 알았는데 내 일기도 다시 읽으니 (아주!) 재밌다. 어떤 일기는 10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상황과 감정이 생생히 기억난다. 여기에 적힌 '나쁜 놈'은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낙서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썼는지, 심지어 언제 어디서 이 글을 썼는지까지도 말이다! 과거를 떠올리면 부끄러운 순간도 많지만 시간이 흘러 미화된 탓에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더 많다. 이런 추억들은 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한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10년 넘게 다이어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이걸 통해서 무언갈 발전시켜야겠다'라는 목적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앞으로도 별다른 목적 없이 다이어리를 꾸준히 쓸 예정이다.
10년 20년 그리고 50년 후에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