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꼭 용기를 내자 (빅터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7)
살다 보면 말이지. 아주 가끔이지만, 진실의 순간을 만나는 때가 있어.
몇 번은 피해 가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아닌 척 할수도 있지만,
결국엔 만나는 “진실의 순간” 말이야.
스무 살, 글 쓰는 동아리에서 회장을 뽑는 날이었어.
여자친구는 누구보다 동아리 활동에 헌신적이었고,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었어.
모두 그녀가 동아리의 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공교롭게 한 표 차이로 동아리에 들어온 지 3개월 밖에 안된 내가 회장으로 선출이 되었어.
회장이 되면 좋아했어야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어. 내가 선출이 된 건 남자가 회장이 되었을 때 선배들이 편한 게 많았던 거지.
그때가 나에겐 “진실의 순간”이었어.
선배님,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이건 너무 비겁한 거 같아요.
OO가 회장이 되어야 하는 게 맞잖아요. 누구보다 글에 재능이 있고, 동아리에 헌신적이잖아요.
여자라는 이유로 회장이 안된다는 건,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글꾼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 거 같아요.
살면서 진실의 순간은 아주 가끔 만나는 순간이야. 진실의 순간에 용기를 낸 말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게 돼.
선배들은 아무 말하지 못했고, 투표는 다시 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녀가 회장이 되었지. 진실이 회장을 뽑은 거야.
죽음의 수용소안에서도 수감자들의 앞에 “진실의 순간”이 찾아왔고, 빅터 프랭크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이야기해.
이 대목은 너무 좋아서, 오랜 시간 기억하고 싶어서 긴 내용이지만 여기에 담아 볼게.
죽음이 너무나 흔하고 가까운 곳에서도 진실의 순간은 존재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힘을 주지.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여섯 번째 겨울을 맞지만 지금 유럽의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었는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 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20명 중의 한 명으로 점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
경험뿐이 아니다.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로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 불쌍한 신의 피조물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의 희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희생은 어떤 경우에나 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희생은 그 특성상 정상적인 생활 속에는, 물질적인 성공이 중요한 세계에서는 틀림없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희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한 동료가 하늘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종말로부터 구원받도록 해달라는 기도였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과 죽음은 의미 있는 것이다. 그의 희생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닌 희생이다. 그는 헛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 바로 그곳, 그 막사에서, 실제로 가망이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이 갖고 있는 충만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이 말을 했다.
불이 다시 들어와 주위가 밝아지자 누추한 몰골을 한 동료들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나에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했다.
- 145~148쪽, 집단정신치료의 경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