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 Jul 25. 2021

기말고사

진통제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오른쪽 아래 허리에서 수년 동안 잊고 있었던 익숙한 통증이 찾아왔다. 통증이 점점 심해져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으나 내일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으면 졸업이 미뤄져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기에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시험이 끝난 뒤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급한 대로 인근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잡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통증이 심해 공부를 할 수 없었으므로 시험 응시에 의의를 둔다는 목적으로 참고 견뎠다. 또 수술을 해야 한다면 어떡할지 막막했다.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 종일 스마트폰으로 난소 종양 관련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통증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수술을 염두에 두고 검사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부인과 질환을 가진 환우들의 수술 후기를 읽으며 실력있는 의사가 있다는 3차 병원을 탐색했다. 수술로 유명한 의사들은 6개월에서 일 년 치 예약이 모두 차 있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진료를 받기가 몹시 어려워 보였다. 아직은 알 수 없는 나의 병명에 대한 불안감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도의 초조함을 경험했고 정확하게 무엇 때문이라 설명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약간의 과호흡 증상도 겪었다. 언제나 항상 그렇듯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행복한 삶의 큰 에너지가 된다는 내용의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살면서 단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는 극강의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일 거라 확신한다.

  시간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 기말고사 시험시간까지 도래했다. 생각보다는 별 무리 없이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통증이 잦아들면서 전화로 미리 해두었던 인근 대학병원의 진료 예약은 취소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했기에 수술하지 않을 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없었다. 사람 생각은 모두 비슷한 건지 내가 진료를 봤던 인근 대학병원 의사에 대한 평가는 사이버 세상 속 환우들도 비슷했다. 유명한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후기가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있는 몇 개의 후기도 모두 실력이 없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 가족들도 그 병원에서 진료를 보면서 다들 한 번씩 안 좋은 경험을 했기에 이 병원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의료진과 병원에 대한 믿음도 없이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의 나를 온전히 맡기는 수술은 할 수 없기에 다른 병원을 물색하느라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놓고 고민하는 사이에 몸 상태가 악화된 건지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자정 즈음부터 시작된 왼쪽 아랫배 통증으로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아픈 몸을 부여잡고 집에서 거리가 조금 있는 2차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2차 병원도 당일 예약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 것이라는 짐작은 했으나 접수 마감이 빨리 되어 아예 진료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멘탈이 잠시 흔들렸으나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전에 진료를 봤었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내가 진료를 봤던 의사는 상급종합병원 전문의 치고 당일 접수도 쉬웠고 대기 시간도 길지 않았다. 진료 전 초음파 검사부터 했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내가 봐도 화면에서 종양으로 보이는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초음파 담당의가 하얀 덩어리가 보일 때마다 마우스로 크기와 위치를 체크했다. 화면에 보이는 것들이 물혹이 맞냐고 물었더니 정확한 것은 진료실 담당의에게 확인하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대기 시간을 가진 후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 화면만 들여다보면서 독수리 타법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언제부터 아팠냐고 물어보기에 지난주부터 아래 허리 쪽에 통증이 심하게 있었다고 했더니 그때 터졌다면서 혼잣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혹이 많아 보이는데 심각한 거냐고 물었더니 이건 혹이 아니라 황체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상이라고 했다. 황당했다. 저렇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크기가 큰 것들이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초음파상으로 보이는데도 황체라고 하면서 정상이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서 약을 처방해 줄 테니 먹으면서 며칠 더 지켜보다가 심해지면 다시 병원에 오라고 했다.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인근 약국으로 향했다. 난소에 좋다는 비타민D와 진통제 2통을 처방받았다. 조제실에서 내려온 약을 전달하면서 약사가 나에게 질환이 많이 심각하냐고 물었다. 심각한 건 아닌데 왜 그러시냐고 되물었더니 이 약은 진통제 중에서도 매우 강한 약에 속하는데 하루에 최대 2알씩이나 먹으라고 처방이 되어 있다면서 내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진료실에서 의사의 어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며칠 더 지켜보자는 말에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환자의 상태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항상 말을 얼버무리는 방어적인 태도에서 본인이 내린 진단에 대해 책임지기 싫어하는 성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살아보니 자신이 내린 결정에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를 보면서 이 병원에서 절대로 수술을 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전 18화 의원면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