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 Oct 21. 2021

점심시간

사망 동의서

  예상대로 며칠 뒤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그동안 수도권 내 유명하다는 병원 의사들의 수술 후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어느 병원에 나를 맡겨야 할지를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급작스러운 통증으로 인해 이른 아침부터 또다시 인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이번에는 초음파가 아닌 CT를 찍어야 할 것 같았다. 병원에서 초진 환자에게 CT 촬영을 바로 해줄 것 같지 않아 기존에 다녔던 병원을 찾게 되었다. 재진 환자이니 이전 진료 기록으로 CT 검사 처방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거고 담당의가 유명하지 않아 예약 환자가 밀려있지 않으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촬영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촬영한 CT 영상을 CD로 복사해 타 병원 진료 시 판독의뢰를 다시 할 생각이었다. 

  원무과에서 당일 접수를 하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진료비 계산서를 간호사에게 전달하자 외래 접수를 하면서 이전 진료 기록을 확인하는 듯했다. 아파서 왔냐고 묻기에 통증이 심해 CT를 찍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진료 차례가 될 때까지 앉아서 대기하라고 했다. 나는 예약된 환자가 아니라서 진료를 보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진료실 대기 접수자 화면에 내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11시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간호사가 예약 시간이 지나고도 나타나지 않은 환자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엿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워낙 병원이 조용하다 보니 선명하게 들려오는 간호사의 통화 말소리로 대화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의료기관을 방문하기가 꺼려져서인지 비대면 전화 진료로 전환을 원하는 환자도 있었고 지금 병원에 가고 있으니 예약을 취소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환자까지 다양했다. 간호사는 기다려달라는 예약 환자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물으며 12시부터는 점심시간이라 본인들도 식사를 하러 가야 하니 빨리 와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상습적으로 진료 예약 시간보다 늦거나 사전 연락도 없이 안 간 적이 많았는데 오전 시간에 진료 예약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저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의료인도 점심시간이라 불리는 휴게시간 한 시간이 소중한 직장인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리를 비웠던 의사가 진료실로 들어가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대기하던 부부가 호명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진료실 밖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의사의 고함소리에 밖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하지 말라는 무언가를 했는지 10분 정도 혼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내의 병명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는 못했지만 밖에 있던 간호사가 키득거리며 웃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질병은 아닌 것 같았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고함치는 소리까지 듣게 되니 스트레스로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몹시 언짢았다. 

  대기 중이던 모든 사람들의 진료가 끝나고 12시가 가까워오자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간호사에게 넙죽 인사를 하며 산부인과로 들어왔다. 일반 환자와는 확연하게 다른 행색에 눈길이 갔다. 의사를 만나러 온 것 같았는데 진료가 끝나지 않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한참을 보다 보니 제약회사에서 나온 직원들인 것 같았다. 영업 담당자 이거나 임상시험 담당자인 것 같았는데 잔뜩 얼어있는 얼굴에서 갑을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온 예약 환자까지 모두 진료를 마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앞서 진료를 봤던 부부에 대한 화가 아직도 남았는지 의사의 언성이 약간 높았다. 대뜸 나에게 뭔가를 잘못했다면서 따져 물었는데 뭘 잘못한 건지를 몰라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잘잘못이나 따지고 앉아있자니 당황스러웠다. 너무 놀라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자 의사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아프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어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병원을 오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했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오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는지 의사에게 되묻고 싶었지만 혼날까 봐 무서워서 참았다. 

  정확한 상황은 복부 CT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미 수술까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놀랄 것은 없었다. 이 병원에서 한참 밀고 있는 로봇 수술에 대해 의사가 이야기하기에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CT 촬영 후 정확한 진단을 받으면 그때 수술에 대해 생각해 보겠지만 이 병원에서 수술받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 수술 방법에 대한 설명까지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처음 이 병원에서 진료를 볼 때부터 본인은 수술을 집도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한 데다가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다른 의사로 변경한다는 인터넷 환우들의 후기를 본 터였다. 서로 불필요한 업무는 덜어내는 것이 피차 편할 것 같았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내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대신 수술을 다른 병원에서 할 경우 그 병원에서 다시 CT 촬영을 하자고 요구할 텐데 굳이 지금 여기서 찍을 필요가 있는지를 물었다. 검사를 여러 번 받아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으니 일단 CT 촬영을 하겠다고 했다. 여러 사람의 소견을 들어볼 필요도 있고 서로 간에 나쁠 건 없어 보였다. 

  내가 진료실 밖으로 나가니 제약회사 직원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나에게 CT 촬영 예약을 잡자고 했다. 오늘 당장 촬영이 가능한지를 물었더니 공복으로 몇 시간 있었는지를 물었다. 통증이 시작될 때부터 CT를 찍어보기로 작정한 터라 13시간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다. 간호사가 급하게 CT실로 전화를 걸어 당일 촬영이 가능한지 확인해보았는데 다행히 한 명이 갑작스럽게 예약을 취소하면서 한 타임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촬영 예정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고 촬영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 정도 걸리기 때문에 일주일 뒤에 진료 예약을 잡자고 했다. 더 빨리 결과를 알 수 없냐고 했더니 며칠 앞당겨주겠다고 했다. 이 이상 더 빨리는 안 되냐고 되물었더니 여기는 응급실이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CT 촬영실은 병원 운영시간 내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고 그만큼 판독도 밀려있었기 때문에 응급환자가 아닌 이상은 앞당겨질 수 없는 구조였다. 

  검사 전 CT 촬영 시 투여하는 조영제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해야 했다. 양식의 상단에는 환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체크리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알레르기 유무와 과거 약물 부작용 등이 있었는지에 대한 7가지 문항을 모두 기입해야 했다. 양식의 하단에는 조영제라는 약물 투여로 인해 10만 분의 1의 빈도로 드물게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있었는데 본인이 사망하더라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항목에도 동의한다는 서명을 해야 검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 병원에서 받은 검사로 인해 환자가 세상과 이별한다 하더라도 그 환자가 거쳐 간 수많은 의료진 중 어느 누구 하나 책임이 없다는 사실에 동의를 해야 하는지 조금 고민했으나 아파서 죽나 검사받다 죽나 그게 그거인 거 같아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내가 여기서 수술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검사만 받는 입장인데도 환자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태도에서 이 병원의 미래가 보였다.

이전 19화 기말고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