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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Oct 24. 2021

CT

조영제

  코로나 시국에 아픈 환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병원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공복 상태로 CT 촬영까지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평소였다면 남는 시간 동안 인근 백화점에서 쇼핑이라도 했을 텐데 공복이라 기운이 없어 불가능했고 하는 수 없이 병원 앞 중앙공원을 걷기로 했다. 밀폐된 실내보다는 실외가 코로나로부터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중앙공원은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지 안으로 들어와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추운 겨울이라 하늘이 우중충해 보였고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는데 나의 현재 상황 때문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날씨와 시국에도 중앙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반려견을 대동하고 있었다. 반려동물의 산책과 배변을 함께 해결하기 위함인 듯했다. 공원 곳곳에 맹견을 조심하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있었는데 사망 동의서까지 작성한 상태에서 맹견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예약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계속 배회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 구석에 일렬로 길게 놓인 의자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나처럼 각자 필요한 검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 같았다. CT 접수실 직원에게 검사비 계산서를 미리 제출해도 예약 시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접수를 해주지 않았다. 직원을 여러 번 재촉한 끝에 겨우 접수를 할 수 있었고 CT실에 40분 정도 일찍 들어갈 수 있었다. 

  탈의실에서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고 또다시 CT실 안에 있는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보호자를 대동한 환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기실에서 대기 중인 두 명의 외국인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들끼리 러시아 언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의 외국인이 명찰을 패용하고 있었는데 정확한 글자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외국인 의료관광 전문 코디네이터인 것 같았다. 검사를 받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언제 입국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입국이 자유롭지 않은 요즘 같은 시국에도 의료관광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CT 촬영 전 사전 검사로 조영제 약물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주사제를 투여했다. 다행히 특별한 이상반응은 없었다. 사전 검사 후 또다시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데 두 명의 의료진이 병동에 입원해있던 중환자의 병상을 대기실까지 이동시켰다. 병상 위의 환자는 연세가 꽤 있어 보였고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듯했다. 그들 역시 한참을 대기해야 했는데 환자와 대동한 두 명 중 한 명은 끊임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고 환자에게는 무관심해 보였다. 이들에게는 아픈 사람을 보는 일이 일상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당연해 보였다. 평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대기자 화면에 내 이름이 올라왔다. 내 앞에 이름을 올린 예약자 두 명과 갑자기 화면에 이름이 나타난 응급환자의 검사가 끝난 이후 CT 촬영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CT 기계 앞에 눕자 원통형 구조물에 커다랗게 쓰인 SIEMENS가 눈에 들어왔다. 그 와중에 장비는 독일제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심이 되었다. 20여 년 전에도 CT를 찍었었는데 같은 기계였나 싶어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촬영 직원이 나의 왼팔 정맥에 연결된 주삿바늘로 조영제가 투여될 거라며 링거 줄을 연결했다. 기계 위에 내 몸을 고정하고 불을 끈 뒤 두 명의 직원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조영제가 정맥으로 빠르게 투여될 거고 몸으로 갑작스럽게 다량의 주사액이 주입되어 신체에 무리가 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정상 반응이라는 안내를 받았음에도 혼자 낯선 기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누워있던 구조물이 원통형 기계 안으로 들어가자 눈을 감고 정해진 시간 동안 숨을 참으라는 음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후 몇 분 동안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상이 없어 안심하게 되었다. 그 후 조영제를 투여한다는 안내 음성이 나왔는데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시간차 공격인건지 한참 뒤 약물이 빠르게 주입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온 몸의 말초신경까지 아려왔다. 혈관으로 다량의 약물이 투입되면서 혈압이 빠르게 상승하는 느낌이 뭔지를 정확히 체험할 수 있었다. 왜 10만 분의 1의 확률로 사람들이 쇼크사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약물이 투여되는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긴 시간을 참고 견디자 약물 투입이 끝난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수 분 동안 기계가 돌아갔는데 서서히 돌아가는 속도가 감소하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다. 기계가 멈추고 모든 검사가 끝난 것 같았는데도 한참 동안 직원이 들어오지 않아 몸이 고정된 채로 계속 누워서 누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직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멀리서 나에게 괜찮냐며 말을 걸었는데 내가 괜찮다고 대답을 하자 깜짝 놀라며 서둘러 다가와 나의 상태를 살폈다. 직원은 내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있어 의식을 잃은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영제가 투입될 때 대부분의 환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거나 기계 안에서 몸을 심하게 움직인다고 했다.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나는 참는 것에 너무나 익숙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런 일로 놀랐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한때 절제가 미덕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공원을 산책하는 개도 자기 성질을 숨기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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