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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Aug 21. 2021

서울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전제되어야 할 것들을 먼저 전제하고


정신없이 지나간 한 달이었다. 춘천에 온 지 육 개월. 그중 최근 한 달은 일상적인 생활패턴을 벗어나 고민의 시간들로만 채워진 채 지나간 것 같다. 먼저 춘천에서 직장을 다니던 아내가 직장을 그만둘 것이라 했다. 조직 내에서 있었던 문제로 심적 고통이 큰 것처럼 보였다. 나도 사기업에 다니던 시절, 세 번의 퇴사를 경험했기에 결정과 통보를 하고 나서 마지막 날까지 회사를 나오는 기간이 얼마나 고역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아내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즉시 회사에 통보했고 출근은 다음 주까지로 최대한 속전속결로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야 육아 휴직하던 내가 복직하면 그만이니까. 그보다 회사와 일을 좋아하던 아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도망치듯 뛰쳐나오려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나만 조용히 복직 준비를 하려 했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내는 공방을 차리고 싶어 했다. 이미 수백만 원이 드는 수제청 창업반 수업을 신청했다고 선언했다.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으나 그럴리는 없었다. 힘들긴 했겠지만 회사에 전반적으로 만족하며 다니고 있었고 사업이나 수제청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길 꺼낸 적이 없었다.


감이 왔다. 어떤 이유로 인해 회사에 일분일초도 더 있고 싶지 않지만 생뚱맞은 시기에 팀장이란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아내에게는 이 퇴사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렇게 급하게 명분을 찾은 것이 수제청 공방이었을 것이고.


그만두는 것이야 별로 대수롭지 않았지만 아내의 회사가 춘천에 있어 나의 휴직에 맞춰 온 가족이 춘천으로 이사 온 것이 좀 아깝기는 했다. 우리는 4년 정도 살 예정을 하고 춘천으로 왔다. 아직 나에게는 4년 동안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쁜 주택을 구했고 아이 둘은 넓은 집과 깨끗한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마음 맞는 이웃이 생겼고 동네가 점점 익숙해졌다. 정말 춘천 생활에 만족했으며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이곳으로 이사 온 가장 큰 이유가 사라진다. 나의 직장은 서울이기 때문이다.


변수가 생겼으니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아내의 창업의지를 꺾는 것이었다.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창업이라는 게 하루 이틀 비싼 돈 내고 레시피 위주의 클래스를 듣는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아내는 창업을 위한 자금을 모아놓은 것도 착실하게 경험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사업과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다. 사업은 예상치 못한 비용이 계속 발생하고 그렇게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종국엔 가정생활이 파탄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의 완강한 반대에 아내도 마음을 내려놓을 무렵,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아내 회사 대표는 아내의 퇴사를 만류했고 조직에 애정이 남아있던 아내는 어렵지 않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와 트러블이 있던 팀원이 있었는데 그 팀원으로 인해 아내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고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했었던 거였다. 그 직원은 어차피 퇴사를 했으니 핵심적인 문제는 사라진 셈이었다. 일이 주 정도 마음고생은 했으나 모든 것이 제자리로 곧 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복직을 준비하던 나의 고민은 이어졌다. 아이들은 학교, 유치원, 학원 스케줄이 새롭게 정착되어 아내의 거취와 상관없이 복직해서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서울로의 출퇴근도 생각해보고 직장 근처에 방을 얻어 주말부부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어린아이들과 아이들을 직장 다니며 홀로 케어해야 할 아내가 쉽지 않아 보였다.


직장이 가깝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데 아직 춘천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서울로의 복직도, 춘천으로의 인사교류도 섣불리 감행할 수 없었다. 아내와 오랜만에 깊고 진지한 대화를 했다.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될까.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나의 직장이 거기 있다는 것과 아이들의 교육환경이 춘천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 첫 번째는 서울의 직장에 미련이 크게 없던 나에게 문제 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역시 우리가 서울의 교육환경이 아주 뛰어난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 형편이 안되었으므로 어정쩡한 곳에 살 바에는 춘천이 오히려 낫다는 결론에 동의했다.


결국은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은 이상 춘천에 계속 살겠다는 생각을 둘 다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들 본인들이 스스로 만족하고 아내도 나도 춘천을 앞으로 지속적인 삶의 터전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춘천에서 계속 산다는 대전제가 생기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복직을 예정했던 것처럼 천천히 하기로 하고 그 사이에 춘천으로 직장을 옮기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고.

다시 느리게 살 준비를 해야겠다.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충분히 시간을 같이 보내고  황금 같은 시기에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찾을 것이다.


춘천은 이제 잠시 들러가는 곳이 아니라 평생 살 곳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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