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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Oct 03. 2023

구멍 (2/4)

2. 1번 구세주의 등장

3시간의 기다림 끝에 밤 9시가 지나서야 드디어 견인차가 나타났다. 저 멀리부터 경광등을 번쩍번쩍하면서 나타났는데 나에게는 구세주가 나타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아직 타이어를 고치는 것은 시작도 안 했으니 일단 '1번 구세주'라고 해야겠다. 


1번 구세주는 건장한 흑인 아저씨였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바로 그런 흑인 영어를 쓰는 사람이었다. 물론 캐나다에도 흑인 아저씨들이 많이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좀처럼 흑인 특유의 억양을 쓰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1번 구세주가 하는 말은 중간중간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 방언도 불사하는 사람들도 있는 마당에 이 정도 방언이야 알아들어야 마땅했다.


우선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내 차를 견인차에 실었다.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견인차를 기다리는 긴 시간 내내 함께 자리를 지켜주신 장인 어르신과 그 친구분에 따르면 견인차를 모는 사람들은 한 밤 중에도 고쳐주는 곳을 알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견인차가 오면 그런 곳으로 견인을 해달라 하자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캐나다 시골 타성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한국이라면 몰라도 여기에 그런 곳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긴 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1번 구세주에게 '여기 번호판을 봐라, 내가 캐나다에서 왔는데 큰일이다. 내일 올라가야 되는데 타이어가 이래서 미치겠다'라고 밑밥을 깔았다. 그러자 그는 '그러게 못 보던 번호판이네. 내일 간다고? 근데 딜러샵으로 가면 월요일에나 고칠 수 있을 텐데...'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하! 이것은 뭔가 방법이 있다는 소리이구나!!


곧이어 1번 구세주의 입에서 복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유 노 맨, 아이 노 웨어 유 캔 픽스 잇 나우. 데이 오픈 투에니 포 아워스.
앤 데이 아 굿. 릴리 굿. 

 

하지만 부족한 나의 믿음을 시험하는지 1번 구세주는 '벗...'이라고 말하면서 라며 말을 흐렸다. 왜 그런가 봤더니 원래 가기로 했던 곳보다 거리가 훨씬 멀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데 돈이 더 든다는 것이었다. 오, 1번 구세주여... 내일 떠날 수만 있다면 돈이 무슨 문제 오리까? 


그래서 얼마나 돈이 드냐고 물어보니 120불이라고 했다. 도대체 이것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감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100불로 안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나의 부족한 믿음을 탓하는 듯,


노 맨. 아이 원 투. 벗 이츠 베리 파 프롬 히아


이라고 답을 하였다. 이 정도 듣고 나니 조금씩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정도가 시가인가 싶어서 그래, 120불로 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나의 믿음은 좀처럼 자라지 못했다. 갑자기 타이어를 갈아 주고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타이어를 교체하는 데는 얼마나 드는지 물어보았다. 아저씨는 타이어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자기가 알기로 80불 정도 들 거라고 했다. 


80불이라고? 


캐나다 시골 타성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믿기지 않게 저렴한 금액이었다. 캐나다에서는 타이어 가게에 가서 숨만 쉬어도 200~300불은 청구될 텐데, 주말 밤에 타이어를 교체하는데 겨우 80불이라니. 혹시 가서 딴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기 때문에 1번 구세주의 인도를 따라 광야를 헤쳐나가기로 결심하였다. 






컴컴한 밤길을, 그것도 방향도 분간이 되지 않는 알 수 없는 길을, 20분 전에 만난 1번 구세주 옆에 앉아서 가고 있으려니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그리고 십 년 전 캐나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2013년, 온타리오의 한 동네에서 자신의 트럭을 팔려고 키지지(중고나라와 비슷한 사이트)에 글을 올린 사람이 있었다. 어린 자식을 둔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는데 저녁 9시쯤 차를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며 집을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트럭을 보러 온 남자 두 명이 별다른 이유 없이 피해자를 살해한 후 시신을 태워버린 끔찍한 사건이었다(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Canadian True Crime이라는 팟캐스트를 참조).


혹시 1번 구세주가 사실은 나의 차를 탐내는 것이라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기 시작했다(변명하자면, 길이 정말 어두워서 망상이 들만했다). 위 사건의 피해자 아내가 '트럭은 가져가도 좋으니 아이들에게 아빠는 돌려달라'라고 울먹이며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도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차는 가져가도 좋으니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만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몰래 구글 지도를 켜서 우리의 위치를 (몇 번이고) 확인해 보니 다행히 원래 이야기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뭐,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 동네에 B뭐시기Q 치킨집이 있는데 엄청 좋아한다며 웃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리는 없었을 텐데, 몇 시간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어서 그런지 온갖 망상이 다 들었던 것 같다.



아저씨의 말 대로 꽤나 멀다는 타이어 가게는 정말 멀었다. 견인차라 고속도로에서 80~90km/hr 정도밖에 달릴 수 없었기 때문에 40~50분을 달려서 겨우 타이어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진만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타이어 가게와는 전혀 다른 외관에 순간 흠칫했다. 


어쨌든 타이어를 고쳐주는 곳은 확실했으니 1번 구세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팁을 포함하여 140불을 건네주었다. 1번 구세주는 조심히 돌아가라며 웃으며 떠났고 우리는 그렇게 2번 구세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은 구글에서. 입이 떡 벌어질만한 광경이라 나도 사진을 찍긴 했는데 너무 흔들리고 말았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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