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 걷는 봄의 기록
걸으면서 쓴다. 물론 마음속으로, 생각 속으로 수많은 글을 쓴다. 때로는 좋은 문장이 떠올라 신나게 머릿속으로 이어 본다. 물론 집에 도착할 때면 사라지는 기억들이지만, 그럼에도 걸으면서 차곡차곡 쌓아간다.
요즘 걷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쓰는 시간도 자연스레 뒤로 밀린다. 지금 이때 아니면, 곧 더워진 날씨에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질 테니까.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란 핑계 없이 그저 운동화 신고 나설 수 있는 날이 그리 길지 않으니 가능한 한 자주 걷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 걷기 시작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사람들과의 만남도 생겼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름’을 인정하는 길. 내향적인 성격 탓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들의 삶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되는 듯하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 그들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배우기도 하고, 함께 나누면서 위로받기도 한다. 책을 통한 간접 경험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듣는 직접 경험이 더욱 크게 와닿기도 하기 때문이다.
혼자 걷는 시간엔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지나가는 차도 구경하고, 매일 달라지는 나무들도 바라본다.
각자의 시간과 순리대로 변화하는 모습들을 관찰하며, 책으로 배우는 세상과 눈으로 보는 세상의 결이 다름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5월엔 좀 더 ‘밖의 세상’에 집중하게 된다.
짙은 녹색 잎들 사이에 돋아난 연둣빛 새싹들만 봐도 참 예쁘다. 곳곳에 씨앗과 모종을 심고, 물을 준 흔적들을 보면서 머지않아 피어날 꽃을 기대해 본다.
봄의 햇살을 느끼며 피어나는 풀꽃들을 구글렌즈로 찾아보고, 그들의 이름도 불러준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전하는 느낌이 드니깐.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 걸까’ 생각도 해본다. 각자의 사연들을 싣고 달려가는 삶들에서 좋은 인생들이 더욱 넘쳐나길 오지랖도 부려본다.
때론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담는다.
혼자 걷는 길에 제법 익숙해진 탓일까,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구나”라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에 속해 있는 내 모습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해외의 거대한 자연 앞에서만 나의 작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장면 속에서도 나라는 작은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걷다가 지칠 때면,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카페들도 있고, 시장 구경, 사람 구경, 가게 구경을 하며 거리를 보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다. 매일 길을 걷는데도 지겹지 않은 이유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매번 다르게 선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시선들을 즐기며 걷는 길이 참 재미있다.
이 작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도 고민하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거리에서 떠오른 생각들은 하나같이 사라져 버린다. 떠오르는 단상을 휴대폰에 녹음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아직 나는 스쳐가는 생각들을 억지로 붙잡기보다는 그냥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놓아준다.
언젠가, 적절한 타이밍에 다시 다가올 거라 믿기에.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나를 더 깊이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나약한 나를 마주하는 일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일까, 요즘 글쓰기와 독서가 조금씩 일상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쓰는 시간’을 선택하고, 아주 짧게나마 ‘읽는 시간’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 좋은 날들이 곧 무더위에 묻히게 되면 에어컨 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열정을 다해 몰입하면 더 빠른 결과가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달렸던 지난 시간들이 꼭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걸, 경험과 실패로 이미 배웠다.
그래서 지금은 나만의 속도를 위해 보폭을 조금 줄여본다. 걷는 길이 더욱 익숙해지고, 거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붙잡을 수 있을 때 한층 더 성숙해진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해 본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렇게 글을 남길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