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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Oct 29. 2020

6. 사회성 결여,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깨진 마음의 파편을 주워 끝을 갈았다. 뾰족한 조각은 칼날이 되었고 우리를 찢었다. 우리에게 난 상처가 벌어질수록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잡아먹혔다. 그렇게 삼켜졌다. 불행히도 나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내 입과 우리의 입은 똑같은 것을 말하게 되었다. 나는 그게 내 우울증이 나아지는 과정인 줄로 착각했다.

 더 좋아지려면 색다른 것을 해야 했다.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S양의 제안으로 호주로의 워킹 홀리데이를 계획했다. 수중에 돈이 없기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고, 모자란 돈은 뻔뻔하게도 부모에게 요청했다. 그러고도 부족한 돈은 동생에게 빌렸다.

 의사는 내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떠나고 싶다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선생님, 혹시 제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가는 거면 어떡하죠?"

"도망가야죠. 힘들면 그래도 됩니다."


 잘 다녀오세요.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오를 준비가 끝났다.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난리를 치고 떠났으니 좋은 것이 도리어 이상하겠지,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집에 연락하지 않았다. 딱히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철저히 잊고 살았다. 호주에서의 나날은 내 인생 최고의 자유 시간이었으니 쓸데없이 속 시끄러워질 일은 끌고 오기 싫었다.

 한국에서 지냈을 때처럼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뚱뚱하고 못생겼어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녀도 괜찮았고 짧은 바지도 입을 수 있었다. 호주에서 사귀게 된 친구 하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큼직한 가방을 자랑스레 들고 다녔고 또 어떤 친구는 살이 붙은 몸인데도 비키니 입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호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운 좋게 구한 아르바이트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이었고 나는 롤을 마는 일을 맡았다. 점장님과 부점장님, 아르바이트생 4명이서 오순도순 일하는 조용한 매장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 오순도순에서 제외된 인물이었다.

 A양은 사회생활을 오래 한 것 같았다.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고 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내 단점을 잔뜩 짚어댔지만 결국엔 좋은 얘기로 마무리해주었다.


"네 인성이 모자라 손님에게 실수를 한 거야, 다음엔 이렇게 대처해보자."


 내가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더라도 그걸 요령 좋게 달래고 행동 방향을 바꿔주었다. 사회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는 어떤 롤모델이 되었다.

 B양은 처음부터 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손이 빠르지 못해 민폐를 많이 끼쳤다지만 그는 본인의 실수를 내 책임으로 전가하기도 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자주 느꼈던 나는 다 들리도록 욕을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그쯤부터 둘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졌다.

 그럼에도 종종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걸기도 했다. 사람을 간사하고 치사한 존재로 인지한 데다 그에게 겪은 것이 있었던 나는 아이러니함에 사고가 멈췄다. 그것이 B양이 한 사회생활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C군은 나보다 키가 크고 서너 살 정도 어렸다. 일주일에 손에 꼽을 정도로만 대화를 나눴는데, "살이 좀 빠진 것 같아."나 "갈수록 예뻐지네." 따위의 말 뿐이었다. 그마저도 놀리는 어투였기에 한없이 불편했다.

 세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A양과 C군이 특히 B양과 잘 지내고 퇴근 후에 곧잘 놀러 다닌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난 이들을 통째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모이면 내 얘기를 하겠지, 그런 일이 없진 않으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왜 칼을 여기다 놨어요, 이거 이렇게 두지 마세요."

"그거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나는 들어오는 모든 지적이 나를 향할 때마다 꾸준히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뒤로 달리는 말을 짧게 만들기 위해서는 "네"라는 한 마디가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다. 억울했다. 안 그래도 미움받고 있는데, 가게 사람들은 "네가 한 일이 아니어도 일단은 그렇게 알아 들어라"라며 나를 다그쳤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내 언사는 점점 더 거칠고 무례해졌다.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커다란 통을 들고나가다 C군이 하는 무례한 말에 화가 나서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놨는데, C군은 지금 화를 낸 것이냐며 나를 위협했고 겁이 난 나는 그게 아니라는 어설픈 변명을 늘어두었다. 치욕스러웠다. 내가 남자였다면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 텐데 화도 내지 못하고 말을 돌리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여자라는 것이, 이 공간에 내 편이 없다는 것이 죽도록 서러웠다.

 몇 개월 후, B양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함께 지낸 정이 있으니 그에게 조심히 돌아가라는 문자를 남겼다. 이러나저러나 같이 지낸 사이이니 좋은 끝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는 기뻐하며 좋은 말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B양과의 관계는 좋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혹시 B한테 문자 보냈었니?"

"네, 그냥 조심해서 가라고요."

"나한테 문자 하라고 시켰냐고 연락 왔어."


 B양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A양에게 "네가 문자 하라고 시켰니?"하고 물었단다. 비행기를 타고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상상하자 속이 뒤틀렸다. 내가 베푼 호의는 그에게 있어 호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내 문자를 받고 기뻤던 그 순간의 감정은 진심이었겠지, 하지만 이성으로 희석된 감정은 더는 좋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을 테다.

 나는 B양에게 문자 한 것을 후회했다.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한 내 성격과 인성을 책망했다.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연거푸 증명받는 기분에 휩싸여 힘없이 우울했다. 호주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고 어쩌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도 상투적인 대화만 주고받았다.

 무기력했다. 그래서 일을 늘렸다. 돈이라도 많이 벌자, 그렇게 주말까지 빠듯하게 일하고서는 퇴근길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그 일대에서 열리는 Light Festival에 다녀와보기로 했다. 룸메이트로 지내고 있는 S양에게 같이 가보자고 연락했지만 그는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혼자였지만 즐거웠다. 군중 속에서 나 혼자 형형색색의 불이 들어오는 거리를 걸으며 물 먹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자학부터 천천히 내려두었다. 그다음엔 현실을 직시했다. 사회성 키우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아직 더 노력해야 하는구나, 그런 깨달음을 상처가 되지 않는 선을 지키며 켜켜이 쌓아 올렸다.

 가까스로 추스르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든 지 20분 정도 지났을까, 불청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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