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나는 부모님이 하는 모든 말씀이 나를 질책한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말들이 내 목을 조르고 뺨을 때렸다. "식사하게 숟가락 좀 놔라." 제 밥벌이도 못하는 계집애가 식사 준비도 돕지 않는다고 질타하는 어투에 화가 났지만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짜증부터 냈다. 식사하러 우리 집에 놀러 온 사촌 오빠는 그런 나를 붙잡고 조심히 물었다.
“너 왜 큰 이모한테 화를 내?”
“내가 뭘?”
“그냥 밥 먹으러 나오라고 하신 건데 화냈잖아.”
오빠의 말에 나는 좀 전의 행동을 다시 생각했다.
“엄마가 먼저 짜증 냈잖아.”
“아니야, 이모는 그렇게 말씀 안 하셨어.”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정신과에서 진료받아 볼 생각 없어? 스무 살 적의 재수 학원 선생과 친척 오빠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인생에서 두 번째 제안을 받은 나는 오빠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정말로 병원 가게?”
우리는 내가 하는 말에 놀라며 물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난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나는 하도 짓씹어 끝이 닳아버린 우리의 손톱을 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도 날 위해서 한 말이었어.”
“넌 기분 안 나빴어? 옛날에 그 선생님도 너한테 피해망상이 어쩌고 했잖아.”
“우리야, 내가 정신과 가는 게 싫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랬다. 당장 정신과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적에 엄마와 아빠의 반응은 지극히 싸늘했으니까. 네게 무슨 하자가 있느냐며, 내 자식에게 왜 문제가 있겠냐며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지만 결국엔 나라는 독립된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에도 돌연변이가 있는데 그보다 더 복잡한 인간은 심하면 심하지 그리 단순하겠는가.
그래서 몰래 다녀왔다. 집 근처에 위치한 병원에 방문해 내 상황을 전부 털어두었고 그러다 엉엉 울었다. 생판 처음 본 사람 앞에서, 그가 정신과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렇게 울 수 있었다. 문득 재수 시절의 심리 상담 선생님이 떠올랐다.
검사 결과는 우울증이었다. 의사는 약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나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려 애를 썼다. "신경 전달 물질이 10개 분비되어야 하는데 우울증이면 2~3개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게 원래대로 10개씩 나오도록 약을 먹는 것이다." 그의 설득은 이러했다.
"약 잘 드시고 무리해서 무언갈 노력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 나는 당장 노력해야만 할 일이 태산인데. 인생은 내게 그 이상의 열심을 강요하고 있었기에 눈앞이 캄캄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다. 사람 많고 복닥 한 곳에서 실컷 쇼핑을 하고 끼니를 해결하러 근사한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음료는 이걸로 하고 이거는 같이 먹자, 그리 짚어두곤 직원을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음식을 주문하기도 전에 테이블 앞에까지 왔다가 그냥 쌩하니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주문도 안 받고 그냥 가?"
"어?"
친구들의 시선은 일제히 내게 쏟아졌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주문했잖아."
"주문하려고 하니까 그냥 갔잖아."
"아니 너 이거 먹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거 주문했어. 기다려봐, 갖다 줄 거야."
아, 이상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왔다가 그냥 갔는데. 나는 테이블 가득 음식이 차려지고서야 뒤늦게 심각해졌다. 다른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맛있다고 즐기는 동안, 나는 이 '주문 사건'으로 혹시 누적된 우울증이 폭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당장은 저혈압과 갑상선 문제로 기억력이 나빠진 줄 알았는데.
그날 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무 살에 재수 학원에서 만나게 된 친구인데 서로 겪은 인생길이 비슷해 나누는 것이 많은 상대였다. 나는 내가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부끄럽고 싫어 도처에 감추고 다니는 상태였지만, 누군가에게만큼은 털어두고 싶었고 그 상대가 이 친구였다.
"야, 종이에 베여도 아파서 약 바르고 밴드 붙이고 물 안 닿게 하려고 그 유난을 떠는데 마음에 상처가 난 것도 유난을 떨어야지 어떡하냐."
그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그리고 너, 고3 때부터 시작해서 재수하고 대학 4년 보냈지, 중간에 편입한다고 계속 공부하더니 대학원 가서 작살나게 고생하고 갑자기 또 재수한 거야. 자그마치 8년이야, 8년. 난 네가 언제 터질지 몰라서,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우울증이 안 오고 베기냐?"
나는 내 고통을 전부 다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마워 눈물을 터뜨렸다. 8년이구나, 못해도 그만큼은 쌓인 상태였구나. 나를 이해하는 사람의 존재란 위로가 된다. 문장으로는 흔해 빠졌을지 모르지만 현실에는 얼마 없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귀중한 보물. 그 덕에 나는 나의 우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인정할 수 있었다.
이번 재수에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실패하고 잘못 선택한 모든 길을 청산하고 바로 잡을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걸음은 온전치 못했고 결과는 제자리였다. 어쩌면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기서 무너졌다.
"우리야."
우리야, 우울아. 우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이다.
"너 어디 가서 우울증 걸렸다는 소리 하지 마."
"안 할 거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잖아. 엄연히 아픈 거고 병인 건데 다들 못난 취급을 하지. 병원에서 그랬어, 우울증은 내 탓이 아니라고. 내가 잘못해서 걸리는 게 아니라고. 이렇게 알고 병원까지 온 것만으로도 너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표정 없이 턱을 괴었다.
"네가 없어지면 난 건강해질 수 있어."
"나는 쉽게 없어지지 않아."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과 세월을 봐, 넌 내가 병인지 네 성격인지 분리할 줄도 모르잖아. 맞는 말에 입이 막혔다. 그래, 아마 내가 자각하기도 훨씬 전에 우리는 내 안에 자리 잡았을 테다. 크고 작은 형태의 이유와 원인들이 하나로 뭉쳐져 사람의 형태로 빚어지기까지 얼마나 짙은 농도의 슬픔이 필요했을까.
나는 우리를 죽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