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의 그 어디쯤
밖에서 볼 때는 다 같은 선생님이지만 교사는 절대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너무도 다른 교과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는 한 명의 담임교사가 모든 과목을 전담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저학년의 이야기다. 각 교과의 고유성 때문에 교사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하고 간섭받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굉장히 독립적이고 자기 주도적이다. 사실 학교장만 하더라도 관리자가 되기 전에는 일개 교과전담교사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담임 장학이란 이름으로 선생님의 수업에 대해 조언과 충언을 내세울 때 앞에서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해도 내 교과에 대해 뭘 안다고.. 하는 마음의 소리가 목구멍을 뚫고 나왔던 경험이 교사들이라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수업을 이루는 큰 틀이라면 그 안에서 교수 방법을 실현해내는 것은 결국 교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의 역량이 중요하고 책임감도 크다.
17년 차 영어교사로서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후회했던 적이 세 번 있다. 첫 번째는 과학중점고등학교에서 과학중점반 담임교사를 맡았을 때이다. 과학 중점이란 말 그대로 과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다른 교과에 비해 주당 시수를 많게는 두 배 이상으로 두어 수학과 과학의 심화 단계까지 배우는 과정을 선택한 학생들이 모여있는 반이 과학 중점반이다. 당연히 이공계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고 남학생이 다수이며 학업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다. 첫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고 많이 놀랬더랬다. 영어가 1등급이 아닌 학생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영어가 제일 쉬웠어요 아이들인가.. 두려움이 살짝 올라왔다. 내 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어떨까.. 무시당하지 않을까.. 소심한 마음에 자신감은 하락하고 걱정은 커졌다. 말하기 중점의 영어 조기교육 세대인 그들 앞에서 중학교 때 처음 영어를 접했던 맨투맨 영문법 세대인 내가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일지도 모르겠다. 읽기 쓰기를 먼저 시작했던 나의 영어 학습법은 듣기 말하기가 선행되는 언어교육 이론을 뒤집는 것이었다. 열심히 단어를 암기하고 문법을 적어가며 어려운 독해 지문을 해석했던 나의 영어 학습법은 영어 습득 단계로 보면 상당히 역행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영어를 좋아했고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영어 교사까지 된 것 아닌가.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성실함을 무기로 열심히 수업 준비에 전념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어떠한 공격에도 강한 수비력을 보일 것. 미국에서는 그런 말 안 쓰는데요.. 라던가 OO이 영어로 뭐예요.. 같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대처할 것. 한 단계 높은 도전적인 과제를 던져주어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도록 만들 것. 그때처럼 수업 준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연구했던 때가 또 있었나 싶다. 학생들 반응 하나에 예민해지고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지만, 반대로 수업을 준비하면서 노력한 것들을 학생들이 인정해줄 때 느끼는 자부심도 분명 있었다. 그렇게 뭔가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 때쯤 혁신학교의 배움의 공동체라는 생소한 환경에 떨어진다. 이것이 내가 두 번째 자괴감을 느꼈을 때이다. 입시교육 경력이 쌓인 탓에 나는 학교를 옮긴 후에도 고3 담임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교실을 들어가서 적잖게 당황했다. 아이들이 모둠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고3이 모둠 수업을? EBS 문제 풀이가 아니고? 편견을 깨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8개월 후면 수능을 치를 아이들에게 협동학습과 모둠 수업은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나는 또 성실함을 무기로 열심히 수업 준비를 했다. 교재는 EBS 수능특강인데 아이들을 모둠으로 앉혀놓고 이런저런 활동들을 짜내어야 하다 보니 결국엔 이도 저도 아닌 수업이 되어 버렸다. 고3은 활동성이 왕성하고 공작 시간을 좋아하는 초등학생들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귀찮다 하는 19살 아이들에게 옆 모둠으로 이동해라, 보드에 뭘 좀 써봐라, 그림으로 표현해 봐라.. 이런 요구들은 잘 먹히지 않았다. 분위기를 업 시켜보려고 해도 아이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요? 이거 꼭 해야 돼요? 등의 세상 시크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2학기가 되자 나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창한 핑계를 대며 전근대적 문제 풀이 방식으로 회귀해버렸다. 내 능력은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배움 중심 수업을 주제로 하는 이런저런 연수를 찾아다닌 끝에 혁신학교 근무 5년 차가 되어서야 과감히 교과서를 버리고 원서로 된 청소년용 소설 한 권을 가지고 영어 독서 수업이란 걸 해보았다. 물론 인근 학원에서 크고 작은 항의가 이어졌다. 자신들이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할 내신 대비 기출문제 준비를 어렵게 했다는 죄목으로..
마지막은 가장 강력하다.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특성화고등학교에 발령받은 나를 동료 교사들은 위로했다. 그곳은 영어에 관심이 없거나 영어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영어 교사에게는 그야말로 험지가 아닐 수 없다. 교사는 학생 선택권이 없다. 필요에 의해서든 적성 때문이든 영어를 원하는 학생들만 만날 수 있는 천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4년, 중학교 3년 동안의 길고 긴 영어 학습 기회의 시간들을 우주 밖으로 날려버린 이 친구들에게 고등학교 영어란 읽을 수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은 외계어일 뿐이다. 혹자들은 그냥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면 안 되냐고 쉽게 이야기한다. 머릿속으로는 여러 번 실행에 옮겨 보았지만 알파벳부터 다시 시작하는 장기 프로젝트에 최초의 발자국을 남길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일단 이 아이들에게서 영어에 대한 흥미라는 것을 끌어내기에는 내 능력이 역부족임을 매일매일 실감하고 있다. 몇 번은 반짝 관심을 보일 만한 아이템과 활동 수업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중인데 이런 수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이 어려운 걸 해내는 것이 교사의 역량이고 숙명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수업 끝 종을 뒤로하고 교실문을 닫으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자괴감이란. 할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늪으로 빠져버리는 절망감. 내가 꿈꾸었던 영어 교사의 모습은 이게 아닌데.. 점점 외면당하는 현실에 적응 안 되는 것도 슬프고 적응되는 것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