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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Oct 09. 2024

그래도 된다.

물꼬 트기

지선은 최근 몇 달간 미안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살고 있나 싶다. 용기를 내 엄마를 찾아간 날에 시작된 미안해는 정섭을 거쳐 김 부장이 마무리를 해주었다. 바닥을 몰라 허둥되고 움츠렸던 다리가 비로소 디딜 계단을 찾았다.     

-미안해. 거참 평소에는 잘 넘어가더니...

지선은 몇 마디를 더 쏘아대고 싶었지만 건너편 수연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봤다. 부서 회의 들어가기 전 김 부장은 몇 달 지선이 조사하고 작성한 보고서를 대신 보고하겠다며 지선 곁에 섰다. 지선은 들은 체하지 않고 보고서를 계속 정리했다. 성격 급한 김 부장은 쯧 소리를 내며 지선의 의자를 자기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순간  밀쳐진 의자가 힘없는 자신인 양 느껴져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지선은 솟구친 무엇에 기대어 김 부장 눈을 정면으로 받았다.

- 사과하세요. 폭력입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 제 것입니다. 보고는 제가 합니다.

그 순간 비로소,  오래 깊게 감았던 눈을 떠 수면 바깥에 늘 있었을, 밝기를 가늠할 수 없는 빛을 보았다. 빛을 본 사람은 눈을 더 크게 뜨게 마련이다.     

- 썬.. 너 요즘 음.. 좀 멋지기도 하고. 행복해 보인다.

정은이 긴 팔을 둘러 지선 어깨를 토닥이며 영화 매표소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도영이랑 잘 되어가냐고 사귀라고 고백하라고 부추긴다. 외롭지 않냐고 재촉하며 팝콘 맛을 고민하며 제로 콜라를 한 모금 들이킨다. 받아 쥔 콜라 컵에 물기를 촉촉하게 느끼며 지선은 오랜만에 팝콘이 달콤해서 정은에게 크게 웃는다.

- 얘 봐라. 도영 씨 이야기만 나오면 웃어? 

지선이 도영을 만나고 보낸 시간은 조각조각을 이어 만든 보자기가 되어주었다. 상담을 하며 만난 그녀들의 말 한마디, 두터운 눈빛 한 조각이 모여 상처를 덮고 하루를 이겨내게 했다. 요즘 같은 마음이면 충분히 불행을 자루고 행복을 이어 붙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가지게 된 애착 보자기는 소중한 인연의 실로 조각난 마음을 촘촘하게 구멍을 메우고 다독인다. 그에 비해 가족은 수세미 마냥 숭숭 뚫린 실들이다. 지선이 마음을 아무리 쏟아도 얇은 실들은 삭아버리고 종내에는 버려지기 일쑤였다.

몇 번에 치유 상담 모임에서 상담사는 웃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짐하듯 눈길을 주며 말했다. 지선은 그 말을 잇고 이어 마음 보자기에 연결했다.

- 수치심이 커지면 자기를 상실하고 나쁜 관계에 주도권을 빼앗깁니다. 그게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상대방이 여러분의 약점을 교묘히 알아차리기도 하죠. 나쁜 관계를 끊어내세요. 수치심을 마음 주인으로 두지 마세요.       

상담사의 말처럼 늘 빈집같이 초라하고 습하게 좀 먹었던 마음에 종종 수치심이 쳐들어 왔다. 수치심은 자기 연민과 남과의 비교를 동반하여 공격했지만 지선은 그래도 된다로 허용했다. 오랜 기간 수치스러워 당당하게 위협했던 수치심은 막아서지 않으니 돌아서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회유도 했다. 수치심은 지금도 무겁게 지선을 제압하고 억압한다. 하지만 조만간 힘을 잃어갈 것이 확실했다.

- 미안해. 우리 엄마가 나만 보고 산거 알잖아. 도저히 어쩔 수 없었어.

정섭이 한 마지막 말에 이전과 달리 참지 않았고 이별을 고했다. 남들이 부러워한 남자의 사랑을 보내면  무엇이 남을까 겁이 나기도 했지만 잘못된 사랑과 연애는 끝내는 걸로 책임을 져야 했다. 첫째 딸일 때와는 달리 부모가 억지로 준 짐이 아니라서 견뎌볼 만하다.

여전히 도영과 함께 상담 치료 과정을 동영상으로 남긴다. 집 근처 헬스장에서 운동도 한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고 삶을 이어간다. 도영과 함께 책 모임을 하고 그를 쓰기도 하나. 오늘 지선은 도영이 웃을 때 따라 웃는다. 드립 한 향기로운 커피를 그녀들과 같이 마신다.     

- 지선씨. 알죠? 그냥 그렇게... 자신이 조금 좋아지는 순간이 오면 같이 기뻐해요.

상담가의 말을 예언처럼 여기며 자주 혼자가 되었다가 간혹 그들과 만났다. 그렇게 하루 하루  더러운 거울을 닦아 내듯 조금씩 선명해져갔다.     

그날 밤 지선은 꿈에서 엄마를 본다. 어릴 적 놀러 간 바닷가에서 엄마와 함께 모래를 파 구덩이를 만든다. 지선은 종종 달려가 노란 물통에 바닷물을 떠 온다. 구덩이에 물을 부어 넣고 쌓인 모래 한쪽을 살짝 건드리자 물이 졸졸 흘러간다. 지선은 엄마와 같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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