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불안, 폭식증, 그리고 극복 이야기 #번외
3년 동안의 근황
2021년의 폭식증과 불안에 대한 글을 쓴 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회복을 할 수 있었던 방법도 브런치로 얼른 공유하고 싶었는데,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에는 글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삶이 다시 활발하게 작동하고 나니 글을 쓸 겨를이 줄어들기도 했고, 글을 쓰기 위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의 따뜻한 늪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부담이 컸다.
나의 회복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었다. 개인 심리상담도 받았고, 서울시에서 진행한 진로 집단상담도 있었고, 정신과 한약도 먹었고,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운동 중독으로 산책도 매일 나갔고... 그리고 이 모든 회복 과정을 매일 휴대폰 일기장에 기록하며 내 감정을 살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브런치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던 이유도 꾸준히 써나갔던 기록 덕분이다.
2021년 9월, 대학원을 휴학하고 국내 작은 의료 스타트업에 조인을 하게 되어 제품기획 일을 시작했다. 따뜻한 주변인들 덕분에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하다가, 대학원으로 복귀할 용기도 다시 생겨 일과 병행하며 수업도 듣게 되었다. 회사가 더 큰 회사로 합병되면서 해외 사업개발로 직무도 변경해 보고, 유럽 중동 출장도 15번 정도 나가 보게 되고, 이런 와중에 졸업 논문을 작성하며 석사 졸업까지 이뤄냈다. 부업으로 작은 파티룸 자영업까지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번아웃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마음의 병은 다른 형태로 치환될 뿐, 사라지지 않는 걸까.
또다시 찾아온 손님, 번아웃
그간 힘든 적이 아예 없었는가?라고 하기에는, 심한 PMS 증상 때문에 지난 1년 반 동안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서 먹었다. 복용했던 약은 일반 우울증에도 사용되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라서, 내 기저에 있었던 우울증 증세도 어느 정도 치료를 해줬던 것 같다. 인생 처음 우울증 약을 먹게 되면서, 이 약은 '나'를 위한 약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간이 방에서 틀어박혀 혼자 어둠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사회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감정을 차단시켜 주는 약'. 이 약이 마음에 들던 안 들던,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통제되지 않는 울음과 두통을 제어하기 위해 이 약을 계속 먹었다.
그리고 1년 반 뒤, 서서히 약을 끊어갔다. PMS 증상이 절반 정도 호전되어 의사 선생님께서도 '슬슬 줄일까요?' 제안을 해주셨고, 마침 계획된 해외 출장도 당분간 없어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약을 줄인 것 때문일까, 사건의 기가 막힌 타이밍 일치였을까. 아니면 회사 3년 차 말기의 흔한 고민이었을까.
나는 3년 전처럼, 다시 매일 모니터 앞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사람일까?
시작은 회사 일이었다. 거래처와 회의를 하다가 내가 너무 무능하다고 느꼈던 날, 뜬금없이 엉엉 울었고 그 눈물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사건을 떠올리면 다시 눈물이 났고, 회사에 갈 생각 하면 다시 눈물이 났고, 일요일 저녁이 되면 눈물이 났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었고,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또 시작되었다. 주변에 나를 도와주고 배려해 주신 분들 덕분에 (회사 사람들은 정말 좋은 분들이다) 현 직무에 대한 조언도 듣고, 직무를 바꿔볼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긴 휴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직무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회사로 돌아갔으나, 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일이 지겨웠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는데, 이런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게을렀고 꾸물거렸으며 우울하고 불안한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3년 전이랑 똑같다. 어딜 가나 3년을 못 버티는 끈기 없는 사람, 대단한 일을 하기에 멘탈이 너무 약한 사람, 뼛속부터 우울한 사람." 심지어 약을 끊으면서 부작용으로 살도 찌고, 폭식증의 공포도 떠올랐다.
한 번 회복한 경험이 있으면 더 쉽게 회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회복하고 돌아오니 예전의 노력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방법을 아니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들었고, 삶의 의미에 대한 거만한 회의감에 빠지게 되었다. 간간히 일상에서 흥미를 잃어버리고, 현대인들의 여러 목표들이 어지럽고 부질없게 느껴지고, 일하는 기계로 만들어주는 약이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권해지는 세상이 그저 불합리해 보였다.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며 사소한 것들로 인터넷 논쟁하기에 바쁜 모순 같은 세계도 지겹게 느껴졌다. 3년 전의 나보다 머리가 조금 커졌다고, 나아지고자 하는 노력의 의미부터 의심하게 됐다.
우울이 너를 영원히 붙들어 매지는 않을 거라는 위안
그럼에도 살아야지, 하며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문구 '죽음에 대한 지각은 우리로부터 치열하게 살도록 한다'를 계속 되새긴다. 아직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붙들고 지낸다. 해질 무렵 올림픽대로와 서강대교를 운전하면서 보이는 여의도 빌딩들 사이에 묻힌 주황색 해와 주변의 핑크색 노을 하늘, 나를 매번 울리는 뮤지컬 '빨래'의 넘버 '비 오는 날이면', 샤워하다가 가끔씩 떠오르는 재미있고 기발한 아이디어들(하지만 전혀 실행되지 않을), 여름밤의 산책과 시원한 맥주 한잔, 세상을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책, 추억을 떠올리며 까르르 웃을 수 있는 친구들...
다시 힘내보려고 책을 한 권 읽었다. 이렇게 시니컬한 상태일수록 팩트가 더 설득이 잘 되는 법 - 책 제목은 「우울할 땐 뇌 과학」이다. 이 책은 '운동해라, 명상해라, 감사해라, 미소 지어라'라는 흔한 우울증 처방법들이 왜 효과가 있는지, 자세한 예시와 과학적인 원리들을 더해 설명하고 있다.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꾸물거리는 것, 나쁜 습관과 중독이 들어오는 것이, 뇌의 어떤 어떤 부분과 역할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것인지 쉽게 설명해 준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3348854
하지만 결국 듣고 싶었던 말은 '우울증은 내 탓이 아니다' 였던 것 같다. '우울이 너를 영원히 붙들어 매지는 않을 거야'라는 위안. 책에서는 우울의 상태를 하강나선이라고 표현한다. 하염없이 끌어당겨지는 터널과 같은 우울증은 어떠한 촉발과 뇌에게 맞아떨어진 여러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다. 반대로 우울증 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상승나선을 촉발하는 일'이라고 부른다. 우울의 저조한 관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상승나선을 가동시키는 행동들을 하면 된다.
우울의 요인은 많고 그중에 유전자도 하나의 요인으로 포함되어 있지만, 결국 우울 패턴으로 가는 것은 그저 '신경 회로적 조건'이 그렇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우울을 토네이도와 비교한다. 토네이도가 건조하고 땅이 넓은 곳에서만 발생한다 해서, 그 조건이 맞아떨어진 미국 내륙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뇌 구조 탓, 내 의지 탓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타고난 성향이 우울을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라고 한들, 그런 성향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조금 불안한 것이 유익할 때가 있다. 뭔가 어리석은 짓을 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때로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좋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줄어드니 말이다.” - 「우울할 땐 뇌 과학」
그래서 나의 우울은
책을 읽고 스스로를 조금 더 용서해 보려고 노력했다. 최악의 어두움까지 빠지지 않고, 여전히 그래도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이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우울은 투약을 중단했기 때문일지도, 3년 차들에게 흔히 오는 증상일지도, 안 맞는 일을 하던 나의 한계에 다다랐을지도, 그저 내가 의지박약이기 때문일지도, 이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휴직 도중에 과감하게 퇴사를 결심하고 새로운 창업팀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회사에서 내가 여전히 기여하고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고, 창업이 아닌 다른 길을 고려해보기도 했는데, 결정해 버리는 것이 때로는 불안을 줄인다는 것을 기억했다.
“우리는 단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우울할 땐 뇌 과학」
내가 창업을 할 수 있을까, 또 무너지지는 않을까?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응원하고 긍정적인 말들을 해줬다. '너는 좋아하는 일은 밤새서라도 하는 사람이다', '너는 똑똑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잊지 말고, 친구들에게 이따금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점검해 달라는 부탁도 하자." -「우울할 땐 뇌 과학」
과거를 돌이켜봤을 때 내가 무언가를 대단하게 해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창업이라는 건 정말 힘들다던데, 나의 200%를 쏟아부어야 한다는데, 내가 아직 남들이 보기에 위대한 노력 비슷한 것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나를 증명할 리소스가 없다면, 그 리소스를 만들어야겠다. 타인은 나를 경험으로 평가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잠재력으로 평가하자, 나의 열정과 재능은 전부 'OK' 사인을 가리키고 있다.
상승나선 만들기 도구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자책을 그만두고, 상승나선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우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3단계 행동 요령을 만들었고, 두 번째는 평소 습관을 기록하기 위한 툴을 만들었다.
나의 우울 상태 벗어나기 3단계 행동요령은 「우울할 땐 뇌 과학」 책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0단계는 평소 괜찮을 때부터 노력할 습관 만들기, 1단계는 불안과 걱정으로 꾸물거릴 때 할 행동들, 2단계는 자책과 망연자실, 눈물이 나올 때 할 행동들, 3단계는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을 때 할 것들을 적어놨다.
습관 기록 툴은 '변하겠다는 결심', '장기 목표의 상기'와 '달성의 기쁨'을 위해 만들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아날로그 다이어리의 디지털화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마음에 드는 기록 툴을 찾지 못해서 계속 아날로그 다이어리를 사용해 왔는데, 노션이라는 툴로 내가 직접 템플릿을 만들게 되었다.
이 템플릿은 다음 글에 소개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사용하면 보람이 정말 클 것 같은데, 만들면서 애를 많이 썼기 때문에 유료 템플릿으로 올려두었다. 아직 노션 템플릿으로 승인이 되지 않아서 승인만 되면 브런치에 함께 공유할 예정이다.
3년 전의 나처럼, 내가 부지런히 회복을 향해 다가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