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
생계를 위한 일을 고민 끝에 사무직으로 바꾸었다. 일과 학업 둘 다 놓치기 싫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어디에서도 자신의 에너지가 잘 쓰이고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 무렵 공부하고 있는 방향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일은 병행해야만 했고, 공부는 가능하면 길게 끌지 않고 빨리 끝내야 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간호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미국에 오자마자 목적의식 없이 학교를 다니다 보니 부담만 커지고 집중은 되지 않았다. 내적 동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 고민 끝에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언어적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학부 때 전공했던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러던 차에 종교는 없지만 법륜스님 법문을 들으러 달라스 정토회에도 가고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도 갔다. 낯선 땅에서 연인과 이별 후 매일 울면서 지내다 보니 마음 둘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사회적 관계가 부족하던 와중에 성당에서는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첫 모임에서 달라스에 있는 비행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를 보더니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처음 듣는 말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으레 인사하는 거겠지' 하고 넘겼다. 그러고 다음 모임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에게 또 승무원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한 귀로 흘려 들었던 그의 말이 그날따라 내 귀에 콕 박혔다.
처음에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이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승무원'이라 하면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살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일단 키도 크지 않은 편이고 얼굴도 너무나 평범하다. 하지만, 그런 외모는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이고 나는 지금 미국에 있으니 도전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에 적지 않은 곳을 다니면서 여행을 좋아했고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즐거웠다. 그리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그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나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나자 상상만으로도 흥분되었다. 당장 직업에 대한 정보부터 검색했다. 더불어 어떤 회사에 지원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당시에는 미국의 3대 항공사라고 불리는 곳들이 어디인지도 몰랐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누가 알려 주는 것도 아니기에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찾기 시작했다. '대학원을 가야 하나'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길로 원하는 회사에 지원서를 제출하고 결과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이 일을 추천해 준 그 친구를 처음 만난 시점부터 서류 전형 합격까지의 모든 일이 불과 몇 개월 만에 일어났다.
혹자는 자기중심 없이 너무 귀가 얇은 거 아니냐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을 닫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기 때문에 새로운 길도 만날 수 있었다고 본다. 무슨 일이든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는 법. 이 길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돌아가도 괜찮다. 혹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휴직이 길어지고 다른 진로를 고민하게 되더라도 과거에 했던 선택에 만족한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큰 세상을 만났으니까.
뜻하지 않게 찾아온 일상의 멈춤이 또 다른 시작을 알려 왔다. 잠깐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미국 항공사들은 노선을 축소하는 것에 더해 9월 말 정부의 재정 지원이 끝나고 일부 직원들을 임시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나 또한 하루아침에 실업 위기에 가슴을 졸였다. 지난봄과 여름은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막막했다. 그리고 이내 평범했던 일터의 모습에 감사함을 느꼈다.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 회사는 온갖 노력(조기 은퇴, 휴직, 타부서 근무, 축소 근무 등 직원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었음.) 끝에 이듬해 여름 전까지 해고는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나도 휴직을 연장했고 일을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짧지 않은 자유 시간이 생겼다.
시간이 많으니 생각이 뻗어 나간다. '타의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면?'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현실. 미국에 홀로, 계획 없이 왔다가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 이상,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누려 보리라. 남부에서 동부로 왔고, 동부에서 다음은 서부로 이동해 보려고 한다. 이제 주어진 환경에 겨우 익숙해지고 안정을 찾나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벗어나고자 한다. 흔들거리는 길 위에서도 넘어졌다고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또 나아간다. 베이스를 바꾸고 이사를 준비하는 요즘은 설렌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이라는 지점에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것 같다. 하루하루 생존하기 바빠서 여유가 없었는데, 미국에서의 지난날들과 나의 가족을 돌아보고 한층 성장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