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일기를 보았다. 어느 토요일에 큰 이모부 환갑을 맞이하여 가족 모임이 있었다. 엄마에게 딸로서도 그렇지만 조카로서의 나는 정말 살갑지 못하다. 그런 내가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담아 큰 이모부께 작은 선물과 카드를 전해 드렸다. 이모와 이모부가 좋아하셔서 나도 기뻤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바로 전 해에 회갑이었던, 그러나 내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못해 그 시간을 쓸쓸하게 보냈을 아버지 생각이 났었다. 화기애애했던 자리에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존재를 잊고 살다가 그가 연상되는 순간 흠칫 놀라기도 한다. 한 번은 승무원 트레이닝 중에 부모님 정보를 회사에 제출해야 했다. 언젠가는 나로 인해 항공권 혜택을 받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엄마부터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는 아버지란이 나왔는데 좋은 일이므로 비워 두기보다는 채워 두고 싶어서 오랜만에 그 이름 석 자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생년월일을 답해야 하는데 순간 멍해졌다. 어렸을 적 수도 없이 말했던 그 날짜가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전화로 엄마를 통해 확인해야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내 남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슬퍼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듣고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나 의문이 들면서도 아버지와 관련된 것들이 대개 괴로운 기억이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망각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폭력의 기억.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겪고 머리를 크게 다쳤다. 이후 중환자실에서 반년 이상 누워 있었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했고 종종 분에 못 이겨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식사 시간에 대화를 하다가도 신경을 건드리는 말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리치던 모습도,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질질 끌고 가며 사정없이 때리던 장면도, 작은 체구의 내가 공중으로 뜰 만큼 있는 힘껏 주먹을 수차례 날렸던 한밤중의 놀이터도 기억한다.
도와 달라고 외가댁이고 경찰서이고 전화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누구라도 죽어 나갈 것 같아 경찰에 신고하면 가정의 일이라며 아무 조처 없이 돌아갔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교수 사택 단지 안에서 맞던 그날은, 마침 지나가던 학생이 ‘살려 달라’는 내 비명을 듣고 다가왔으나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에 곧장 가던 길을 다시 가버렸다. 나는 누구도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루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잠시 밖에 나와 있던 중에 엄마에게 말했다. 이렇게 살 거면 엄마, 동생과 셋이 따로 살면 안 되겠냐고. 시간이 흐르고 엄마는 그때 나의 말에 용기를 내었다고 했다. 그 말이 고생문이 열린 계기가 되었던 것만 같아 늘 마음 한구석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자리했다. 마침내 엄마의 일생일대의 결단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부모님 이혼 소송 중 법원에 출석하여 함께 살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살기 위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지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어린 나는 죄책감까지 안고 살아야 했다. 그 누구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여느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처럼 나도 '내가 잘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힘들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짐작은 했으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웠다.
돌아보면 충분한 설명과 공감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일이니까 이유 불문하고 따라야 하는 분위기에 더해 나와 동생이 상처받을까 봐 원가족 얘기는 일부러 꺼내지도 않는 배려 아닌 배려는 내게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믿으셨다지만 그 시기에 온전히 슬퍼하지 못하고 쌓여만 갔던, 다루지 못한 부정적 감정들은 십 대의 나를 휘감았다. 자연히 ‘아버지’는 집안에서 금기어가 되었고 내 기억 상자에만 묻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