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애를 안 낳아보셔서 몰라요.”
얼핏 보면 단순한 의견 같지만, 이 말은 무척이나 많은 것을 내포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지 않은 사람은 아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의사에게 "선생님은 암에 걸려본 적이 없으셔서 몰라요."라고. 이 말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상실한다.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논리에 응해봤자 불행한 상황만 이어진다.
만약 교사가 이렇게 답했다고 치자.
"저도 아이 있어요.
"몇 명 키워요?"
"둘입니다." (하나였으면, 둘 안 키워봐서 몰라요)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
"딸 하나, 아들 하나요."(딸만 키우면, 남자애 안 키워봐서 몰라요. 아들만 키우면, 여자애 안 키워봐서 몰라요)
"사춘기는 겪어보셨나요?"
"네, 일찍 결혼해서 대학생입니다."(나이가 어렸다면, 자녀가 아직 어려서 몰라요.)
"그때랑 지금이랑 시대가 다르잖아요."
"......"
이 대화는 끝이 없다. 그리고 본질과는 무관하다. 학부모의 의도에는 교사에 대한 존중도 없고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선생님은 애를 안 낳아보셔서 몰라요.”라는 말은 단지 교사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는 자신이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교사보다 아이를 더 잘 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교사의 판단과 조언을 통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의를 끌어가기 위함이다. 교사의 교육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모로서의 경험을 내세워 이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교사와 학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학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중에 학생에 관한 것만 얘기해보자.
가정에서 부모는 한 아이를 오랜 시간 키우며 한 아이의 성장 과정에 대해 잘 알 것이다. 교사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는다. 교사는 한 해 동안 25명 내외의 아이들을 관찰한다. 이를 5년, 10년으로 확장해 보라.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알게 되겠는가? 학생들에 대한 데이터는 교사의 경험에 축적되어 판단의 근거가 된다. '보통'의 아이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평균적인 시각과 통찰이 생기는 것이다.
부모가 한 아이의 발달 과정을 깊이 있게 본다면, 교사는 수많은 아이들의 모습을 비교하고 분석한다. 두 관점이 교차되는 지점, 두 정보를 조합해야 아이의 현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이 모습과 학교에서의 아이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교사는 아이의 사회적 적응, 학습 태도, 또래와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며 아이가 가정과 사회라는 두 세계 속에서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루도록 돕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학부모가 교사에게 이겨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아이에 대해 듣기 싫은 정보를 들어서 이기려는 것인가? 교사가 아이에 대해 좋지 않은 정보를 굳이, 애써, 일부러 제시할 리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지치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잘 성장하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싶을 뿐이다. 자녀에 대해 일차적 최종적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에게 말이다.
교사를 신뢰하지 않는 태도는 학부모 자신에게도 손해다. 교사는 아이를 객관적이고 다각적으로 관찰하며, 가정에서 볼 수 없는 점을 발견한다. 이를 활용하지 않고, “선생님은 몰라요.”라는 말로 대화를 차단한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아이와 학부모다.
교사를 신뢰하지 않는 학부모는 결국 자신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한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것은 학부모의 선택이다. 그러나 아이가 또래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한다면, 이는 부모의 책임이다. “그렇게 잘 안다면 왜 아이는 그 모양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학부모에게로 돌아간다.
학교에서 교사는 바쁘고, 때로는 지친 상태에서 일한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말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오랜 관찰 끝에 참고 참다가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사의 전문성을 무시할 만큼 대단한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가정과 학교는 다른 공간이고, 교사는 아이의 균형 잡힌 성장을 돕는 전문가다. 학부모와 교사가 협력할 때, 비로소 아이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선생님은 애를 안 낳아보셔서 몰라요.”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례한 발언인지 깨닫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