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남자친구였던 시절, 그는 내게 여러 가지를 약속했다. 앞으로 너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식의 약속.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장담하지 마라."
지키지 못하면 결국 거짓이 될 약속들은 애초에 하지 말라 일렀다. 호되게. 그저 지금 당장 자신의 다짐과 소망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굳이 냉담하게 받아치는 여자친구를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오래도록 이 마음은 변함없었다. 지킬 능력과 의지가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런데 최근 이 믿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뒤에서 아무리 날 위한다 해도 말하지 않으면, 티내지 않으면 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날 향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난 평생 그가 날 위해 어떤 일까지 벌였는지 알 길이 없다. 이제껏 내게 필요했던 것은 ‘무조건 지켜낼 약속’만 받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날(혹은 우리를) 위하는 진심’, ‘약속을 지키기 위한 다짐’을 확인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면 약간은 생색 낼 필요도 있겠다 싶었다. 어떻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겠지만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약속 하나쯤은 건네는 것으로.‘내가 널 위해 이런 노력까지 했다고’라며 어필하기 위함보다 상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또 상대에게 넌 지금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여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순간 상대의 실망을 감내할 용기.
나는 약속을 하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한 편이다. 함부로 약속하면 안 된다는 나의 신념 탓에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쉽게 맹세하지 않기 때문일 테다.
“우리 새벽이 생계형 직장 말고 글 쓰는 일 하게 해줘야 하는데.”라고 말하는 남편.
많이 어려워진 회사 사정에 “미안하다.”, “곧 일어날 거야.”라고 말하는 상사.
그들에게 '확실히 지킬 수 있나?'라고 따져 묻지 않으려 한다. 내 실망을 받아낼 그들의 용기에 감사하며 그저 그들의 진심을 믿어 본다.
그래도 한 번 기대볼 희망은 진심과 의지가 충분히 전해졌다면 실망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테다. 물론 깨진 맹세를 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상대라면 충분히 실망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그대의 열심을 곱씹으며 낙심했던 마음을 추스를 테다. 이는 상대의 몫이다.
중요한 것은 터무니없거나 뜬구름 잡는 약속 따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만큼 온 마음 다해 최선을 다해야만 깨진 약속도 그저 허풍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내 주변에게 어떤 약속을 할 수 있을까?
당장은 내 아이에게 했던 모든 약속이 거짓과 허세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먼저일 테다.
* 표지 사진 출처 | Unsplash @Andrew Petr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