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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할 효도를 끝내가는 중인 너에게

by 새벽숨


내가 어떤 존재라도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면 세상살이가 꽤나 쉬워진다. 가녀리고 처량한 주인공이 악독하리만큼 혹독한 배경에 던져져도 곳곳에서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다면 앞으로 해쳐갈 여정이 외롭지 않은 것처럼.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를 떠올려보자면 일반적으로 부모님이 그렇겠지만 모두에게 그 사랑이 주어지지는 않을 테다. 탄생부터 환영받지 못한 이도 있겠지만 때로는 부모에게는 사랑이었지만 자녀에겐 그렇게 기억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장 안타까운 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연인 관계는 어떨까. 그 어떤 이해관계도 따지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여러 종류의 사랑에서도 정말 순도 높은, 고차원적인 감정이고 행동이다. 사명이라 여기지 않고는 절대 도달하지 못할 수준의 사랑. 개인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자녀의 부모 사랑. 그런데 조건이 있다. 자녀의 성장 과정 중 스스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기에 한해 자녀는 부모를 향해 맹목적인 사랑을 쏟는다. 사실 자녀 입장에서는 오직 보호와 관심을 바라는 호소일지도 모르나 부모에게는 그저 사랑으로 보인다. 아이의 온갖 재롱에, 애교에 육체는 피로에, 하지만 정신은 행복에 젖는다. 밥만 잘 먹어도, 응가만 잘해도, 잠만 잘 자도 모든 것이 효도인 그 시기. 평생 할 효도를 다 한다는 약 5년의 기간 동안 부모는 세상에서 가져본 적 없는 사랑의 늪에 빠져버린다. 아이가 원수로 느껴지는 시간마저 늦은 밤 옆에서 잠든 천사를 바라보는 시간 속에 흔적 없이 녹아버린다.


잠든 아이의 주먹 쥔 손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살며시 넣어본다. 그리고는 새벽 감상에 젖어 밀려오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서운 다짐을 쉽사리 마음 밖으로 꺼낸다. 그토록 이유 없는, 목적도 없는 사랑을 처음으로 체감해봐서 정신이 나간 것이다.


‘네 평생을 책임질게.’


비록 초등학교만 가도 친구가 가장 소중하고 엄마와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는 네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이 3년의 사랑을 갚으려면 지금부터 네 평생, 아니, 아마 내가 먼저 갈 터이니 내 평생을 다해도 모자라겠다는 감상을 나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한밤의 달빛에 홀려 나도 모르게 질러 버렸다.


부모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그래도 쉽게 던지면 안 되는 약속이었다. 새벽에 나를 끌어당기며 놀자고 하는 너보다 잠이 더 소중한 나에게는 이런 다짐이 얼마나 경솔한지. 배고플 때, 잠이 부족할 때, 아플 때. 내가 더 소중해질만한 상황이 튀어나올 때마다 모성애는 배부르고, 개운한 정신에서만 나오는 것이냐며 스스로를 어이없게 바라보는 나에게는 더욱이 조심해야 했던 약속이다.


하지만 동시에 드는 생각. 모든 부모는 세상에 내놓은 자식에게 이 같은 무서운 약속을 매일같이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한다. 이해(利害)를 생각지 않고, 목적을 두지 않고, 이유를 찾지 않고 그저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세상 유일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약한 나 하나 믿고 거친 세상에 맨몸을 던진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는 로디에게


곧 어린이집 졸업을 앞두고

유치원에 들어갈 너.


어제 사진 정리를 하다가

로디 어린이집 첫 등원 영상을 보는데

선생님 도움을 받아 딸기를 포크로 콕 집어

재빠르게 입에 넣어 오물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런데 오늘 아침,

공교롭게도 외할머니가 로디 식판에

딸기를 놓아 주셨는데

혼자 포크로 딸기를 집어

입에 쏙 넣는 너를 보니

격세지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2년도 안 된 시간동안 어찌 이렇게나 컸니.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지는 너는

엄마의 도움을 뿌리칠 때가 많고

그러다 꼭 사고를 쳐서

엄마한테 ‘이놈’ 소리를 듣게 될 때도 많아.


그래도 서서히

엄마의 보호에서 독립하려는

너의 마음과 행동이 반갑고, 아쉽고 그러네.


양육의 목적은 결국 독립이라지만

그럼에도 부모는 자녀가 언제고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어떤 선생님의 말이 떠오르는데

엄만 그 말에 적극 동의해.


내 평생 너를 육적으로, 심적으로

돌보겠다는 한밤의 약속을 계속 떠올리며

오늘도 너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

주먹 쥔 너의 손에

엄마 손가락을 살포시 집어넣어보는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


매일 춤으로 엄마 배꼽 빠지게 만드는 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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