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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Feb 15. 2024

엄마는 나 안 사랑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vs “넌 날 사랑하지 않아.”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더 가슴 아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도 슬프지만 내 사랑이 부정당하는 것이 이렇게나 아플 줄 몰랐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하는 아이의 입에서 ‘엄마는 나 안 사랑해’라는 말을 듣다니. 


아이를 재우던 중 아이에게 “아이고, 예뻐라. 어떻게 이렇게 예뻐어?”라며 얼굴을 쓰다듬었는데 아이가 “로디(글에서의 애칭) 안 예뻐.”라는 것이다. 아이는 요새 뭐든 안한다고 한다. “밥 안 먹어.”, “옷 안 입어.”, “어린이집 안 가.”, “기저귀 안 해.” 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로디가 왜 안 예뻐! 이렇게 예쁜데!”


“로디 안 예뻐.”


“아니야! 로디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엄마가 로디 진짜 사랑해.”


“엄마 안 사랑해.”


모든 단어 앞에 ‘안’을 붙이는 요즘의 로디니까. 엄마 싫어, 엄마 미워 정도는 애교니까 별 생각 없이 대응했다. 


“힝. 로디는 엄마 안 사랑해? 엄마는 로디 사랑하는데.” 


“엄마는 로디 안 사랑해.”


장난이겠지. 그런데 날 바라보지 않고 천장만 보는 아이. 어둠에서 반짝이는 눈과 달리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가만히 눈만 깜박인다. 장난이면 눈꼬리가 주름지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웃음기 하나 없이 건조한, 28개월 아이에게서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놀란 마음에 조금 더 분명히 물었다. 


“엄마가 로디 안 사랑해?”


“엄마는 로디 안 사랑해요.”


“아니야. 엄마가 로디 얼마나 사랑하는데.” 


(대답없음.)


“엄마가 로디한테 화내서 그래?”


“네.”


“로디가 위험해보여서 그랬어. 그리고 아파트에선 뛰면 안 돼. 아랫집에서 ‘아이고, 시끄러워’하는데 로디가 자꾸 뛰니까 그랬어.” 


(눈만 깜박임.)


“그래도 엄마가 부드럽게 말 못해서 미안해.” 


“네.” 


그런데 다음 대화에서 결국 무너졌다. 


“그럼 로디는 엄마 안 사랑해?”


“로디 엄마 사랑해.”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순간에도 아이는 엄마를 사랑한다. 


이 대화를 이후로 생각날 때마다 아이에게 물어본다. “로디 예뻐?” 그러면 “로디 안 예뻐.”로 먼저 대답하지만 기분 좋을 때면 “로디 예뻐.”라고 한다. 이것도 강요일까. 그래도 아직 28개월이면 거울 보면서 자기가 제일 좋은 시기 아닌가. 스스로를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아이를 낳고 3개월 쯤 지났을 때 내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친정 엄마에게 ‘살면서 엄마한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말을 했을 때 엄마의 마음이 그랬을까. 본인의 방식대로 자식에게 한없이 희생하고 사랑을 퍼주던 부모에게 자식은 그 희생과 사랑을 절반도 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면 그 사실은 자식에게만 아픈 일이 아니라 그 부모 가슴까지도 후벼 판다. 


28개월 아이는 아직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의식이 건강하게 형성될 때까지 충분한 사랑을 받는 것일 텐데 이 집 엄마는 마음으로만 사랑하고 있었나보다. 먹고, 입고, 싸고, 다치지 않고, 피해주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둔 육아를 한 탓일까. 


이 대화가 있고 나서 며칠 뒤 휴일에 아이는 공원에서 실컷 뛰었다. 날이 풀린다고 했는데 바다 근처여서인지 귀가 에는 듯했지만 아이는 콧물을 흘리면서 신나게 뛰어다녔다. 예쁨 받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지라 주변 할머니, 할아버지의 시선을 즐긴다. 자신에게 관심 가져 주는 어른이라면 가던 길도 뒤돌아서 애교를 부린다. 그 와중에도 뛰다가 다칠까봐 엄마는 “조심!”이라고 소리친다. 살면서 소리라곤 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들 엄마가 되니 이리도 변한다. 바이킹을 타도 평생 소리를 질러본 적 없는 나는 소리 지르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게 겁이 나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였다. 그랬는데 어찌 이렇게 되었는가. 


“엄마는 로디 사랑해.”


로디의 이 말이 진심으로 들릴 때까지 열심히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보다 빠르면 고등학생 때라도 물리적으로 부모 곁을 떠날 수 있다. 마음으로는 초등학생만 되어도 부모를 쉽게 떠난다. 부모보다 좋은 것이 많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실제보다 많게 느껴진다. 


마음과 몸이 떨어지기 전인 지금. 엄마가 부르지 않아도 자석처럼 엄마 다리를 잡고 안 떨어지는 지금. 잠결에 옆에 있는 엄마를 짧은 팔로 완전히 안으려 노력하면서 고생했다는 듯 팔뚝을 토닥여주는 지금. 


원 없이 사랑을 퍼줄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뿐이다. 


* 남아있는 고민 

뛰지 말래도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웃으면서 계속 뛰고 있는 아이에게 과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매트를 시공했지만 뛰게 둘 수는 없다. 아이에게 슬리퍼를 신길 수도 없고. 그저 뒤꿈치를 들고 뛰거나 사뿐히 걷는 방법을 훈련시킬 뿐. 아들 셋 집이면서 가장 아래층인 밑에 집의 배려에 오늘도 감사를 표한다. 1층이었으면 적어도 ‘피해주는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할 텐데. 진지하게 다음 집은 1층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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