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만나기 까지(일곱 번째 이야기)
시험관 시술을 하고 나면 난소는 많이 지쳐있게 된다. 무리하게 과배란을 하고 채취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쉬어주는 게 좋다. 물론 휴식의 과정 없이 바로 다음 차수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의 몸과 마음은 너무 지쳐있었다. 바로 이식할 만한 냉동배아조차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쉬어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어차피 시험관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많이 지체할수록 불리해진다. 결국 내 나이와 난소의 나이만 더 늘어갈 뿐이기 때문이다. 난소 나이가 많아진다는 건 '난소 기능 저하'를 의미하고, 내 나이가 많아진다는 건 '고령 임신'을 의미한다. 둘 다 임신에는 안 좋은 조건이다. 잠시 쉬어가는 동안 다시 한약을 먹어보기로 했다. 당장 뛸 수 없다면 하다 못해 걷기 연습이라도 꾸준히 해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 상황이었다.
경주에 유명한 한의원이 하나 있다. '난임'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원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해서 여행 겸 약을 지으러 화창한 어느 가을날 함께 경주에 갔다. 그곳에서 약을 지으려면 전 날 밤에 도착해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룻밤을 잔 뒤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한다고 했다. 아, 그렇게 까지는 차마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 새벽 동트기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꽤나 먼 길을 떠났다. 도착하니 아직 오전 시간이었는데 한의원은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접수 데스크에서는 '지금 오신 것이냐'며 물으며 번호표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늦게 와서 어떻게 약을 지으려느냐'는 듯한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은 그저 내 자격지심이었을까. 얼마나 기다려야 되냐고 물으니 오후 늦게나 가능할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일단 그곳을 나와 경주를 둘러보며 시간을 때웠다. 점심도 먹고, 시내 미용실에 가서 남편 머리도 잘랐다.
오후 늦게 다시 한의원을 찾아 진맥을 하고 약을 지었다. 동트기 전에 집에서 출발을 했으니 거의 12시간 만에 간신히 만난 한의사와의 만남은 고작 3분 정도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택배로 받은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됐을까.
갑자기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하혈의 양은 상당했다. 놀라서 한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된 한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혈이 너무 심하면 약을 끊으라'라고 했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가. 왜 하혈을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 약을 지으려고, 그 먼 길을 다녀왔는데 원인 모를 하혈만 계속되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보다도 나는 또다시 무언가에 농락당한 기분이 들어 처참했다. 물론 그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먹고 어렵게 임신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유명해진 것일 테고,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결국 또 나의 문제인 걸까. 한의원을 향한 원망에서 다시 모든 것이 나의 문제인 것 같은 자책으로 원망의 대상이 그렇게 옮겨갔다.
결국 어렵게 지은 약은 반도 먹지 못 한 채 하수구에 몽땅 버려졌고, 약을 끊어도 하혈이 멈추지 않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시험관 시술을 받았던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다. 한약을 먹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의사는 일시적으로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 그럴 수 있다며 피임약을 처방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호르몬 불균형으로 하혈이 있을 경우에는 피임약을 먹게 된다. 피임약이라는 것이 결국 호르몬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 일종의 치료제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나 간절히 임신을 원하는데 피임약을 먹고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해를 넘겨 나는 35살이 되었다.
어쨌거나 낙담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나는 그게 무엇이든 이전보다 더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내 마음만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아이 없이 살면 어떨까?
남편에게 그 질문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물을 때마다 남편은 늘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아이가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아이가 없어도 크게 상관없어. 지금 이대로도 행복한데."
똑같은 대답을 하는 남편에게 나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했다. 나는 어쩌면 남편에게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발언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강하게 말해 주었다면 남편 때문이라도 더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를 참 좋아하는 내 남편은, 아이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내 남편은 늘 한결같이 대답했다. '없어도 괜찮다'라고.
가수 '윤종신'이 '정인'과 '조정치'의 결혼 선물로 만들어 주었다는 '오르막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가사가 꼭 우리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이 노래를 들으며 많이도 울었다.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난 견디겠어.
우리는 '원인불명' 난임이었지만 나는 '난임'의 원인이 꼭 나에게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이 그랬다. 늘 평탄치 않았고, 무엇을 얻으려면 남보다 10배는 더 애를 써야 했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형통하게 살아온 남편이 굳이 나를 만나 이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남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항상 아팠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배 주사를 맞을 때도, 질정을 넣을 때도 단 한 번도 남편에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 꼭 주사를 놔주고 간다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질정 까지도 대신 넣어준다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나는 꼭 나 때문인 것만 같은 이 시련에 남편을 가담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디 까지나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누구보다 한결같이 자상하고 따뜻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난자 채취가 있는 날은 금식을 해야 하는데, 그런 날도 남편은 함께 금식을 하며 오전 9시에 병원에 가서 채취를 하고, 마취가 깨어 집에 돌아올 저녁 시간까지 대기실에서 꼼짝도 않고 나를 기다렸다. 그 사이 나가서 뭐라도 좀 먹고 오라고, 집에라도 다녀오라고, 아무리 말 해도 듣지 않았다.
노래 가사처럼,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였기에, 계속 그렇게 나를 바라봐주는 그 힘으로 나는 그 시간들을 오롯이 견뎌냈다.